총알을 휘어서 쏘거나, 고속으로 달리는 중에 사람을 차에 태우는 장면. 지난 몇주간 이런 저럼 매체에서 볼 수 있었던 "원티드"의 티져 영상이었다. '툼레이더' 시리즈와 '미스터&미세스 스미스' 이후 나에게 여전사로 각인된 안젤리나 졸리와 유순하게만 보이는 제임스 맥어보이, 이전 작품들에서 인상 깊은 연기를 보여준 모건 프리먼 등이 최고의 킬러로 등장하는 이 영화의 티저영상은 나에게 관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즐기기에 충분히 좋은 영화"라는 것이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적인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화려한 액션들 만으로도 100여분의 러닝 타임이 아깝지 않았다. 물론 이 영화라고 전혀 생각할 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생각의 거리'라는 것이, 전체를 관통할 만한 것이 아니고, 단편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마쵸(macho) 영화 초반,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He's the man!"이다. 유약하게까지 보이는 제임스 맥어보이는 영화 초반 상사에게 시달리고, 동료에게 이용당하며, 심지어는 애인을 동료에게 빼앗긴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남성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말해주고 있다. '거칠게 자신을 피력하는 것이 남성적이다'라는 것. 하지만 이 영화는 말하고 싶었던것인지 모른다. '거친것이 남성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남성적인 것이다'
자신을 가두지 말라 제임스 맥어보이가 영화 초반 무기력해 보였던 것은 성격의 탓도 있겠지만, 자신이 잠재력을 공포 장애로 생각해 약물로 억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 스스로의 가능성을 가두지 않고 열어 놓는 순간 진정한 자신의 잠재력을 깨닫게 된다. 사실 우리 스스로도 어떤 어려운 일에 닥쳤을 때, "이 일을 내가 어떻게 해."라는 생각보다는 "할수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할때 자신의 능력이 극대화되곤 한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 이 영화의 최대 반전은 "적아(敵我)의 반전"이라 할 수있다. 눈 앞에서 진실이라고 보였던 것들이 조금더 알고 보니 거짓이었다는 것. 그리고 거짓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 진실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현실로, 눈에 보이는 광고나 언론의 주장에 자신의 관점을 투영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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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 스마트] 마냥 즐겁게 즐길수 있는 미국식 첩보 코미디
코미디 영화처럼 국적을 뛰어넘기 어려운 장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웃음"이라는 것은 그 시대의 사회상이나 문화적 특수성에 상당부분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이슬람의 '알라'를 모티브로 유희로 삼을 수 있지만, 같은 것을 접한 이슬람 문화권 사람에게는 신성모독이며, 용서 받지 못할 범죄일수 있다는 점이 그 예가 될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외국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코믹물이 국내에서는 그만한 성과를 이루지 못한 것이 아닐까?
"겟 스마트"는 '007 시리즈'를 노골적으로 패러디하며 1970년까지 미국에서 방영된 동명의 코믹 첩보 드라마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한다. 또 "겟 스마트"의 감독을 맡은 피터 시걸 역시 '총알 탄 사나이 3', '너티 프로페서 2', '첫 키스만 50번째' 등에서 그만의 코미디 세계를 가감없이 보여줬다. 이에따라 "겟 스마트"는 상당 수준의 흥행을 기대하게 했고, 실제로 미국에서는 그 기대에 부응한다 할 만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앞서 밝힌바와 같이 '문화의 벽'을 제대로 넘지 못해서일까? 우리나라에서는 그만큼의 흥행을 기록하고 있지는 못하고 있다.
이전 포스팅에서도 한번 언급한 바와 같이 유행은 돌고 돈다. 우리나라 코미디는 심형래로 대표되던 '슬랩스틱'이 식상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어느새 개그콘서트로 대표되는 '스탠딩 개그'가 주류를 이루게 됐다. 또한 어느새 그 '스탠딩 개그'의 한계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슬랩스틱'으로의 회기를 모색하고 있다. 사실 스탠딩 개그라는 것이 주로 '말'로 이루어지는 언어유희에 가깝기 때문에 문화적·시대적 특성을 강하게 탈수밖에 없다. ― 사실 이는 정확한 사전적 정의에 의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스탠딩 개그가 언어유희에 가깝다고 언급한 것은 국내에 소개된 대부분의 스탠딩 개그를 보고 난 후의 개인적인 느낌에 가깝다. ― 하지만 아무래도 슬랩스틱은 문화나 시대의 특성의 영향을 덜 받기 마련이다.
"겟 스마트"는 피터 시걸의 다른 코믹물과 같이 '슬랩스틱'의 공식들을 성실히 따르고 있을 뿐 아니라 나름대로 탄탄한 내용의 첩보물을 골격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그 재미는 배가되고 있다. 사실 이미 국내에는 '총알 탄 사나이' 시리즈가 비슷한 유형의 코믹물로서 소개된 바 있다. 하지만 '총알 탄 사나이가' 시나리오보다는 '슬랩스틱'에 훨씬 큰 비중을 둔 바람에 극에 집중할 수가 없었던 반면, "겟 스마트"의 '슬랩스틱'은 줄거리에 대한 집중을 해칠 정도는 아니며, 요소요소 적절히 배치된 '슬랩스틱'은 오히려 줄거리에 대한 재미를 더한다고 하겠다. "겟 스마트"가 국내 개봉을 통해서 기록적인 흥행을 기록할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미국식의 코미디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부담없이 웃고 즐기기에는 손색이 없는 영화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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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오르는 이유" - 작자 미상
산에오르는 이유는 산이 거기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늘 가까이 다가가는 길은 모두 산을 통해 나 있기 때문이다.
산에 오르는 또 다른 이유는 한 눈에도 차지 않는 사람 사는 세상의 사소함에 크게 한번 웃고 싶어서이고 맑은 바람에 씻어 휘리릭 휘리릭 하늘로 날려보낼 몇 마디 욕지거리가 있어서이고, 뽑아버려야 할 묵은 피가 있기 때문이고, 내려와 더 악착같이 진정으로 사랑하며 살기를 다짐하고 싶어서이다
산은 그렇게 그냥 거기 있는 산이 아닌 거고 살아서 의지가 되고 맞장구 쳐 주는 이해심 많은 고마운 이웃이고 아직 산을 오르는 이유는 산 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고. 산 만한 사람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시의 작자(作者)를 알수가 없어 "미상"으로 표기했다. 인터넷에는 "우라노스"라는 이가 작가인것 같이 나오기도 하지만, 우라노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하늘의 신"이기에 그 진위를 알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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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크레더블 헐크] 자아 정체성 위기(?)에서 벗어난 액션 히어로
최근 상영된 만화 원작의 슈퍼 히어로 영화들의 주된 관심사는 그들의 "자아 정체성"에 있었다. 갑작스레 생긴 능력에 대한 그들의 반응, 혹은 태생적 고민, 그리고 스스로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고민까지. 대부분의 원작이 슈퍼 히어로의 액션 활극에 촛점을 맞춘데 비해 최근의 영화들이 다소 철학적인 주제로 빠지는 것은 일종의 유행에 대한 편승이 아닌가 한다. 어느 순간 우리는 영화를 단순히 영화로 보는 것이 아니고, 교화의 매체나 특정 메시지 전달을 위한 메신저로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돌이켜보면 5,6년 전을 즈음하여 영화를 중심으로 한 매체들에 대해 "철학"과 "결말의 반전", "통념의 전복(轉覆)"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같다. 물론 그때는 그것이 단순 오락물로서의 역할이 강했던 매체들에 참신함을 덧 씌우기 위한 시도였다. 하지만 유행은 돌고 돈다 했던가? 단순 오락 거리로서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중요시 됐던 그런 "철학과 반전의 중시, 통념의 전복" 풍조는 어느새 "진부한 표현 방법"이 되어버렸기에, 이제는 다시금 순수한 오락물로의 회귀를 준비하고 있다.
이번에 개봉된 "인크레더블 헐크"는 그 연장선상에 있다. 물론 이 영화에도 "헐크"와 "브루스 배너" 사이의 정체성에 대해 언급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브루스 배너가 평범한 사람이 되기 위한 발버둥이지, 근본적인 "자아 정체성"고민이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설령 그것을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라고 받아들일지라도 극의 전반을 관통하는 정서의 흐름은 아닌것이다. 이 영화는 전통적인 오락물의 공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선악 대립의 단순 명쾌한 줄거리, 풍부한 볼거리, 권선징악의 요소까지. 더불어 "Mr. Blue"가 헐크의 혈청에 반응하는 부분을 보여줌으로서 속편에 대한 복선까지도 보여준다. 이 "Mr. Blue"는 헐크의 혈청에 관심을 가지고 헐크를 도와주던 인물이지만, 그 도움이 자신의 "연구에 대한 욕구"를 위한 것인지 헐크를 "돕기"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선악의 중간 선상에 있는 사람이기에 그의 변화가 더욱 기대된다.
최근들어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즐겁게"만 볼 수 있는 영화에 보다 후한 평을 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이 영화 역시도 "오락영화로서 매우 완성도 있다"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선악과 흑백을 구분해 그 경계를 뚜렷하게 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고(是非之心), 대부분의 남자들은 파괴적인 본능 ― 여기서의 파괴적인 본능이란 호승심과 호전적 기질 등을 가리키는 것이지 결코 무언가를 파괴해야 한다는 본능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 을 내재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 영화는 어느정도의 대리 만족을 느끼게 해 줄것으로 기대된다. 이 영화는 액션 영화에 거부감 없는 여성에게, 그리고 사회적 책임으로 자신의 "액션 본능(?)"을 자제하고 있는 남성들에게 좋은 "오락 거리"로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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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프닝] 조금은 기분 나쁜 인류에의 경고
환경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지금, 어떤이는 인류의 등장이 곧 지구 환경에 대한 위협이었다는 독설까지 서슴치 않고 있다.
사실 고대 인류의 역사는 자연과의 싸움에서 비롯되었고, 산업 혁명이후의 인류는 지구의 모든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위험인자가 되어버린 것 역시도 사실이다. 영화 "해프닝"은 보는 사람마다 느끼고 생각하는 바가 조금씩 다르겠지만, 나는 그 주제를 자연의 인류에의 경고로 이해했다.
영화 "해프닝"은 식스센스의 극적 반전을 이끌어낸 감독 M. 나이트 샤말란의 새 작품이다. 식스 센스의 참신함과 트레일러(trailer)에서 보여준 자극적 영상들은 나를 기대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트레일러의 모든 장면은 영화 초반 30분 안에 모두 볼 수 있다는 것.
나는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가장 큰 힘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가멸음(富)이나 귀함도 결국 그 사람에 대한 타인들의 마음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정치 권력 역시도 그 권력 아래 있는 사람들이 자의든 타의든 그 권력을 인정했기 때문에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물건을 팔때, 그 물건을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으면 그 물건을 파는 사람은 일신의 가멸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아무리 비천한 사람일지라도 타인으로부터 마음을 얻으면 그들의 귀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정치 권력 ― 여기서 정치 권력은 의회 정치에서의 그 권력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군권(軍權), 직장 상하간의 권력 등도 포괄적으로 여기서 말하는 정치권력에 해당한다. ― 에 대한 것은 이론(異論)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이 역시도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자의에 의한 정치권력에 대한 인정이란, 자신이 마음으로 선택한 자신의 지도자에게 자신의 권리를 일부 위임한 것이기 때문에 이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수 있다는 것이다. 타의에 의한 인정 역시 마찬가지인데, 특정한 체계하에서 힘있는 자들이 특정인의 권력에 의지해 있을 때 개인은 그 권력을 부정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각종 불이익을 마음으로 두려워하여 그 체제의 암묵적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다수가 불만을 가지는 독재체제에 대해 대다수의 사람이 한꺼번에 반감을 품으면 전복시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체제에 대한 불만이 산발적으로 발생해 주변인에 의해 제압되거나, 그 모습에 공포를 느껴 반감을 삭이는 모습들 역시 사람의 "마음"과 그 마음을 다스리는 인간 본능에 의지하는 바가 크다 할수 있는 것이다.
이럴진대 어떤 존재가 그런 사람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다면, 그 존재가 인간 세계를 지배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이가 있을까? 이 영화 "해프닝"에서는 "(나무로 대표되는)자연"으로 추정되는 존재가 인간의 마음을 조종해 인류 종말을 유도하고 있다. 여기서 내가 "추정"이라는 어휘를 선택한 이유는, 영화에서는 끊임없이 "나무"를 원인으로 들고 있지만 끝까지 명확한 결론을 내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한 이 영화의 주제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 영화에서는 인간이 정복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자연은 결코 우리에게 정복될 대상이 아니며, 우리는 오히려 그 자연의 일부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경고"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제나 소재에 비해 다소 거칠고 자극적인 영상이 조금은 나에게 불쾌한 느낌을 들게 만든다. 영화 자체가 불쾌하다기보다는 그 안에서 풀고 있는 이야기의 여운이 잔변감(殘便感)처럼 찝찝하게 남다고 하는 것이 맞는 이야기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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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푸팬더] 특별하다고 생각하면 특별해진다.
긍정적인 것이던, 부정적인 것이던, 극장가와 관련된 소식으로는 단연 "쿵푸 팬더"가 압도적이다. 나 역시 "슈렉" 제작진의 노고가 그대로 스며있는 이번 영화에 대한 기대가 무척이나 컸기에 그 관람 대열에 동참했다. "쿵푸팬더"에 대해 가장 부정적인 소식은 지난 6월 7일 용산CGV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쿵푸팬더' 상영중 다소의 기술적인 문제가 발생해 환불 사태가 있었다는 것이었는데, 나는 우연찮게도 그 소식은 듣지 못한채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오후 7시 10분 상영분을 관람했다.
애니메이션 자체의 내용만으로는 "슈렉"에 비해 평이하다. ― 여기서의 "슈렉"은 오직 첫편만을 말하는 것이다. 슈렉의 두번째, 세번째 편이나 특별판인 "슈렉 더 홀스"의 경우 그리 형편 없는 것은 아닐지라도, 참신함과 완성도 면에 있어서 첫편의 아성을 넘기에는 부끄러운 수준이다 ― 하지만 슈렉과 같은 패러디나 상상치 못한 반전은 존재하지 않더라도, "쿵푸팬더"는 속도감 있는 전개와 곳곳에 숨겨져 있는 웃음 거리로 관객들을 충분히 즐겁게 해주고 있다.
"쿵푸팬더"는 "운명론"이 그 가운데를 관통하고 있다. 주인공 "포"가 "용의 전사"로 선택되는 과정이나, 또 그가 "용의 전사"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포나 그의 주변 인물들이 "우연"과 "운명"중 어떤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느고 믿느냐에 따라 일의 가부나 진퇴, 발전 가능성이 결정된다. 물론 이 "운명론"에 대한 얘기도 극중 대사부 우그웨이가 친절하게 강조해준다. "우연이란 건 없어."라고. 또 한가지 교훈을 찾을수 있다면 "세상을 헤쳐가는 최고의 비법은 믿음"이라는 것이다. 용의 전사가 되기위한 "용의 문서"도 궁극의 맛을 낼 수 있는 "국수 비법"도 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 이런 결론적인 이야기의 누설은 영화를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재미를 반감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한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영화 소개"라기 보다는 "감상평"이라는 점을 되새기며 이해를 구한다. ― 이 영화에서는 단지 그 "비법"이 있다는 믿음이, 그 믿음을 가진 사람을 얼마나 강하게 만드는 지를 보여주고 싶은 것같다. 물론 이런 내용도 친절하게 포가 얘기해 준다. "비법은 없었어. 특별하다고 생각하면 특별해지는거야."
마지막 엔딩 크레딧에는 "쿵푸허슬" 등에 삽입돼 우리에게 익숙해진 칼 더글라스(Carl Douglas)의 "Kungfu fighting"를 비가 다시 부른 곡이 흐른다. 아마도 이것은 한국 관객, 혹은 아시아 관객을 위한 드림웍스의 서비스가 아닌가 싶다.
"쿵푸팬더"는 전체 연령대가 관람 가능한 애니메이션이지만, 어른들도 충분히 즐길만한 영화가 아닐까 한다. 오히려 어느정도 나이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유년시절 즐겨보던 "홍콩 무협물"에 대한 추억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할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어린 아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 그 자체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대사부 우그웨이가 남긴 말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Yesterday is 'history', tomorrow is a 'mistery', today is a 'gift'. That's why we call it the 'present'". 어찌보면 언어 유희라 할수 있는 말 같지만, 삶 전체를 꿰뚫을 수 있는 철학이 담겨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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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원피스"의 리더쉽
만화책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광적인 팬도 아닌 나에게 만화책은 그렇게 다양함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중에는 내가 즐겨 찾아보는 만화도 있다. 과거에는 "드래곤볼"과 "슬램덩크" 등이 그랬고, 요즘은 "열혈강호"와 "원피스"가 그렇다.
원피스에는 상당히 특이한(혹은 특별한) 인물들이 주인공이다. 멍청하다 싶을 정도로 엉뚱한 해적선장과 그를 구박하기 일쑤인 선원들. 하지만 서로간의 믿음으로 자신의 역할을 해 나가면서, 그들은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인 "동료"가 되어간다. 오늘 지인들의 블로그를 돌아보던 중, 닷넷엑스퍼트의 이건복 사장님의 블로그(http://keon.egloos.com/)에서 흥미로운 글을 하나 읽었다. 바로 만화 "원피스"의 주인공 "루피"가 가진 리더쉽에 관한 글이었다. 그 내용을 옮겨보자면 다음과 같다.
Vision 그 리더의 조건으로, 만화속 루피는 자주 팀원들에게 '가장 큰 보물을 찾고야 말겠다'라는 비전을 제시한다. 그 비전이 허황되고 어려운 일이라도 팀원들에게 분명한 목표를 제시한다. 그냥 그렇게 '매일 같은 일만 하면서 먹고 살자'식의 해적질은 아니라는 것이다.
Trustship 그 다음으로 루피의 끈끈한 동료에 대한 믿음을 들 수 있다. 배신한 것 처럼 보이는 동료를 끝까지 믿어주고 그 동료를 구하기 위하여 목슴까지 바칠 정도의 모습을 보이는 장면은 39살의 나이의 아저씨가 보기에도 가슴이 뭉클하다. 사실 많은 조직에서의 가장 큰 문제는 직원과 관리자 서로간에 신뢰가 없어지는 것이다. 관리자는 직원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일의 대부분을 직원을 감시하기 위하여 소모한다. 직원 역시 마음속에 있는 말을 회사나 관리자에게 꺼내지 않는다. 하지만 진정한 신뢰는 서로에게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 먼저 시작해야 하다는 것을 원피스에는 보여준다.
Positive Mind 이 만화를 보면서 가끔 끄게 웃게 되는 장면이 아주 심각하고 고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주인공 루피는 엉뚱하게 음식에 집착하거나 단순한 놀이를 하곤한다. 모두가 인지하는 심각한 상황에서는 의도적으로 긍적적인 상황으로 바꿔주는 것이 러더쉽에서 요구되곤 하는데 이런 부분도 놀라울 정도로 만화에서는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다. 어떤 부정적인 상황에서의 긍정적인 인식으로의 전환 역시 배울 점이다.
People 만화의 시작은 루피 혼자 보물을 찾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후에 한명씩 선원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중에는 피터지게 싸운 적(敵)이었던 선원도 있다. 그리고 뜬금 없이 보기 흉한 해골에게도 선원이 되어 달라고 조르기도 한다. (만화다 보니 대부분 나중에 알고 보면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이거나 마음이 착한 사람이라능~) 어찌되었든 리더는 좋은 사람을 가릴 줄 알고 자신의 조직에 적합한 사람을 태울 수 있어야 한다. 엉뚱한 사람 한명 때문에 조직이 와해 되는 경우도 종종있다.
나 역시도 만화를 보면서 막연히 생각해 오던 내용이긴 하지만 이렇게 정리된 것을 보고나니, 새삼 만화속 루피라는 인물에 대해 일종의 "부러움"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비단 그 스스로의 "능력"에 한한것만은 아니다. 어떠한 리더든 그를 뒷받침해주는 동료가 없다면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겁장이 저격수에 괴팍한 성격의 무사와 요리사, 좀도둑 출신의 돈만 밝히는 항해사. 누구하나 정상적인 인물은 없지만 각자의 목표를 위해, 각자의 개성을 유지하며, 하나의 "오브제 작품"을 만들어가는 듯한 그들 "밀집 모자 해적단" 자체가 부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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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더이상 인터넷을, 그리고 언론을 있는 그대로 믿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세간에 떠도는 근거 없는 소문을 유언비어(流言蜚語)라 한다. 이런 유언비어가 떠돌게 되는 원인은 크게 두가지로, 하나는 정치적 폭력에 의해 언로(言路)가 막혀 있을 경우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정당성을 공적(公的)으로 확보하지 못한 집단 또는 개인이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상대를 공격하는 비열한 수단인 경우이다. 하지만 그 어느 편도 내용의 진실성보다는 퍼트린 자 또는 조작한 자의 주관과 목적에 더 충실하게 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정의감에 의해서든, 사적(私的)인 이익을 위해서든, 또는 정치적 폭력이 두려워서이건, 자기를 드러내면 금세 그 목적이 탄로날까 두려워서이건, 그 근원이 뚜렷하지 않은 이상 진실 여부에 대한 토론이나 비판이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듣는 사람이 좀 이상하게 느껴져도 전하는 사람 또한 '들었을 뿐'이기 때문에 따져 물을 수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슬기로운 사람은 유언비어를 들어도 전하지 않는다. 진실은 확인할 길이 없고, 꾸며댄 자나 퍼뜨린 자의 주관과 목적만 되풀이 강조되는 그런 종유의 뜬소문을 다시 전하는 것은, 잘해야 용기 없는 정의(正義)의 주관(主觀)에 뇌동(雷動)하는 것이 되고, 자칫하면 악당을 쓰러뜨리기 위한 다른 악당의 계교를 도와주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반 민중들에게 생각 밖으로 위력적인 것이 또한 유언비어이다. 퍼져나가는 동안의 알 수 없는 자가증폭(自家增幅)의 속성은 때로 선동력으로까지 커벼 어줍잖은 기폭제(起爆劑)로도 강력한 권력 집단의 몰락을 가져오는 경우가 있기도 한 까닭이다.
위의 말은 내가 한 말은 아니고, 작가 이문열씨가 삼국지 초반 "황건의 난"을 소개하며 덧붙인 말이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이 이야기는 진실 혹은 진리에 근접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유언비어에 의한 누명으로 생사를 달리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달리하기도 했던 것이다.
아주 가까운 예로 "쓰레기 만두파동"을 들 수 있다. 한때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쓰레기 만두파동"은 결국 실체가 없는 "해프닝"으로 끝났으나, 그 과정에서 상당수의 만두 제조 업체가 폐업을 선택했고, 일부 경영인은 따가워진 사회의 시선과 경제난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세상을 등지기도 했다. 또한 이 사건을 통해, 대다수의 국민들이 먹거리에 대한 불신을 키웠고, 국가 이미지에도 심대한 손상을 입었다. ― 실제로 이 당시 외국에 수출된 많은 먹거리들이 리콜되어 돌아왔다. ― "쓰레기 만두 파동"의 요지는 단무지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단무지 짜투리 부분을 만두 제조에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단무지를 가공할때, 그 원료로 사용되는 무를 통째로 단무지로 가공 한 후 잔뿌리나 무의 껍질등을 벗겨 포장하게 되는 데, 그 잔뿌리나 껍질등이 만두소의 재료로 사용됐다는 것이다. 물론 이 내용을 대충만 본다면 잔뿌리나 무의 껍질등이 단무지를 만들고 남은 "음식물 찌꺼기" 혹은 "이물질"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한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진실은 정말 다른 곳에 있다. 일단 음식물 찌꺼기 정도로 생각될 수 있는 단무지 짜투리들은 우리가 먹고 있는 단무지와 완전히 동일한 조건(위생 조건·가공 절차 등)하에 가공된 것이다. 단무지 제품과 그 짜투리는 최종 포장 안에 들어갔느냐, 들어가지 못했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실 위생 조건으로 본다면 단무지 자체를 안먹는다면 모를까 그 짜투리가 위생이나 영양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다. ― 사실 나는 단무지 자체를 잘 먹지 않는다. 하지만 단무지 짜투리가 음식물 쓰레기나 불량품이라는 주장에는 선뜻 동의할수 없다. 이것은 마치 과일 농장에서 "상품(上品)"의 과일을 상자포장해 고가의 제품으로 만들고 "하품(下品)"의 과일을 따로 모아 "떨이"제품을 만드는 것보다 덜하면 덜했지, 더한 차이는 아닐 것이다. 또 한가지, 만두소를 만들때 상품(上品)의 단무지를 사용한다고 가정해보자. 아마도 가공의 첫단계는 다량의 수분을 포함한 단무지에서 물을 짜내는 것일 것이다. ― 실제로 집에서 만두소를 만들때또 먼저 김치의 물을 짜내는 것이 보통이다 ― 하지만 잔뿌리나 단무지의 껍질은 제품화된 단무지에 비해, 육질이 단단해 함유하고 있는 수분양이 적어 가공하기도 수월할 수 있다. 즉, 만두소를 만들때 단무지 짜투리를 사용하는 것은 위생·영양상 아무 문제가 없을 뿐 아니라, 가공의 수월성을 얻을 수 있다. 또한 그냥 버려질수 있는 잔뿌리와 껍질을 사용함으로써 음식물 쓰레기도 그만큼 줄어들이 때문에 오히려 우리에게는 장기적으로 도움이 될수도 있는 일인 것이었다. ― 아마도 예전처럼 농촌 지도소가 제 역할을 한다면 단무지 짜투리 활용을 독려했을 수도 있는 일이다 ― 결과적으로 "쓰레기 만두 파동"에 관련된 모든 사항은 법정에서 '무혐의'처리 됐으나, "무혐의" 처리에 대한 내용을 "쓰레기 만두 파동"을 떠벌일 때만큼의 비중으로 보도해 주는 언론사는 없었다.
내가 문제라고 보고 있는 것은 이런 언론의 보도 행태이다. 사실 "쓰레기 만두파동"에서도 정말 제대로 된 정론지(正論紙)라면, 한번쯤 그 실체적 진실에 관심을 가졌어야 했다. 하지만 각종 언론 매체는 공을 앞세우기 위한 경찰 권력이 불을 붙여준 "쓰레기 만두 파동"에 기름을 붙고 부채질하는데 급급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언론 스스로 유언비어를 확대 재생산하는 첨병의 역할을 자임하게 만들었다.
이에 덧붙여 이 사건을 통해 느끼게 된 문제점 중 또 하나는, '사회적 이슈'에 대응하는 이른바 "스타"들의 자세이다. 쓰레기 만두 파동 당시, 영화 "올드 보이"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배우 최민식은 "나는 올드보이에서 만두만 먹었을 뿐 아니라 평소에도 즐겨 먹는다. 쓰레기 만두를 만드는 사람은 사형감이다."라는 요지의 인터뷰를 내기도 해, 국민들의 원성에 기름을 붙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 사건 자체가 무혐의로 처리된 시점에 그의 후속 발언에 대한 전언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대부분의 스타들은 그들 스스로 "공인(公人)"으로 자처한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스스로의 자처함에 걸맞지 않게 사회적 책임도 느끼지 못하고, 대중에게로의 발언이나 행동에도 신중함이 없다. ― 나는 연예인이 공인이라는 점에 절대 동의할 수 없다. 공인이라 함은 공공의 돈으로 공공의 직(職)을 수행하는 국회의원이나 공무원, 혹은 공공 기관 근로자로서, 그 사생활의 청렴함 역시 공공의 감시 대상에 포함되는 사람을 말한다. 하지만 연예인이라는 직업은 연출된 노출을 통해 금전적 이득을 얻어가는 사람으로서, 그 사생활은 공공에의 노출 범위가 아니며, 청렴함 역시 개인의 양심에 따를 뿐이다. 하지만 대중에게로 잦은 노출 빈도에 의해 사회적 책임이 증가하고 있으며, 그들의 도덕성은 법제적 테두리가 아닌 개인의 양심에 의해 강제되어야 한다. ― 여기서 연예인 혹은 스타들에게 바라는 사회적 책임이란 여론의 흐름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해 인기를 제고(提高)시키는 것이 아니라, 여론이나 대중이 미처 짚어가고 있지 못한 점을 인지해 신중하게 대중을 이끄는 것을 말한다. 그런 시각을 갖추지 못한 연예인은 차라리 침묵함만 못하다. 물론 혹자는 "개인의 발언권 침해"라 말 할수도 있지만, 그들의 공공에의 노출로 금전적 이득을 보는 사람인 만큼, 또 그만큼 사회적 파급력을 갖춘 만큼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 사건은 제대로된 식자(識者)라면 눈앞에 당장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는 또다른 진실을 알고자 노력하고, 그 진실의 균형을 잡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확인시켜주는 일화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최근 일고 있는 광우병 파동에 대한 문제는 어떠한가? 인터넷 기술의 발달로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시위를 네티즌들이 생중계하고, 시시각각으로 시위 현황을 업데이트해준다. 여기서 시위장면 생중계는 차치(且置)하고, 시위 현황에 대한 뉴스는 이른바 "카더라"통신이 난무한다. 또 이를 인터넷 언론이나 정론지에서는 여과없이 재중계한다. 물론 그 근거를 밝힐수 없기에 기사의 마지막 부분에는 "증거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상태이다"로 끝나고 있는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일반 네티즌들은 그 기사를 보고, 그 기사가 진실이라 생각하고 분노한다. 또 이 기사의 진실성에 시비가 일면, 해당 언론사는 은근슬쩍 기사를 내리면 그만이다. 일단 조회수를 올리고, 판매고를 올리고 보자는 "황색지"의 전형이다. 사실 시위현장의 인터넷 생중계에도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군사정권 아래서의 언론 조작 예로, 보도 사진을 들 수 있다. 지면으로 나가는 사진은 시위대의 반대편. 즉 전경측에서 바라본 시위대의 모습이 주로 채택된다. 그렇게 되면 사진에는 성난 모습으로 전경에게 다가오는 시위대의 모습을 부각돼 시위대의 폭력성을 강조할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사진"이라는 매체가 가지는 "객관성"때문에 시위 현장에 있지 않았던 사람들은 그것을 진실이라 믿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한가? 시위현장 중계의 열에 아홉은 시위대의 편에서서 촬영한 장면을 보여주게 된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주도적으로 "미국 소고기 수입 반대"시위에 나간 사람들을 비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가 접하고 있는 정보가 얼마나 객관적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행동해도 늦지않으나, 대다수의 대중들이 너무 즉흥적인 반응들이 보이고 있는것이 아닌지 하는 걱정이 되는것이 사실이다. 인터넷에 범람하고 있는 정보들의 객관성과 진실성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래(古來)로부터 지성인에게는 사회적 책임을 물어왔다. 사회나 그 구성원이 올바른 정신과 균형잡힌 비판의 잣대를 가지고 발전해 나갈수 있도록 그들을 이끌어줘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작금의 어줍짢은 지성인들은 황색지와 동화되어 자신의 아집을 공고히 한 채, 사회 전반의 시각을 편향된 방향으로 몰고 나가는 것이 아닌가 싶은 걱정이 된다. 이런 다소 건방진 글을 쓰는 나 역시도, 어설픈 배움과 시각을 가지고 분에 넘치는 글을 인터넷이라는 공간에 흩뿌려 놓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