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 시상식에서 강호동은 "혼자가면 빨리 갈 수 있다. 하지만 함께가면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말을 했다. 강호동을 그를 위시한 동료들에 대한 애틋함을 표현한 것이겠지만, 이 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함께 간다는 것. 이것은 살아가는데 있어 모든 분야에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인생을 함께 살아가는 부부, 삶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친구, 함께 일을 하는 직장 사람들. 어쩌면 그 이외의 '내 주변' 모든 사람이 나와 "함께가고"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래도 나를 낳고 길러주시고 이끌어주시는 부모님께는 '함께한다'는 말을 쓰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부모님께는 말 그대로 '이끌어주신다'는 표현이 맞을듯 하다.) 하지만 내 주변의 모든 사람을 '동료'라 하지 않고, '함께한다'고 하지 않은 것은 왜 일까? 그것은 아마도 누군가를 '동료' 혹은 '파트너'로 인정하기 위한 '믿음'의 유무가 아닐까?
이 글에서는 만화 "원피스"에 나오는 "동료애"에 대한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글의 목적이 상기의 거창한 서론에 비해 빈약하다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만화 "원피스"에 나오는 동료에 대한 생각, 그리고 그들로 이루어진 "팀(team)"에 대한 생각이 나의 그것과 너무나도 일치하기 때문에 만화의 내용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어떤것이 동료이고, 그 동료에 대한 믿음의 조건이 어떤 것인지 명확해지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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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쿠르트] Trust yourself? or Trust only yourself?
알파치노, 콜린파렐 주연의 이 영화는 개봉한지 벌써 7년이나 지난 "구식(?)" 영화다. 개봉했을 당시에 이미 본바 있지만, 이번에 케이블TV를 통해 다시 보니 이전에는 들지 않았던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 이렇게 글을 남긴다.
이 영화는 사람들이 영화속에나 볼수있는CIA라는 특수집단을 치밀하게 묘사해 현실감을 부여한다. 사실 내가 CIA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아는 바는 전혀 없기 때문에, 이 영화가 얼마나 현실과 가깝게 CIA를 묘사했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단지 여기서 '치밀하게 묘사'했다는 표현을 한 것은 그 조직의 속성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요소들을 기존과는 다르게 '드러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묘사되는 CIA는 한마디로 '정의의 사도'에 가깝다. 하지만 CIA와 같은 첩보기관은 비밀의 유지가 조직 유지의 핵심이기 때문에 그에 따르는 비위(非違)가 비일비재(非一非再)할것이라는 것은 쉽게 예측가능하다. 보다 철저한 비밀 유지를 위해 동료간에도 그 비밀을 유지하고, 때로는 기만(欺瞞)해야 하는 것이 '일'이라면 그 문제는 보다 심각하지 않을까? 그런 측면에서 영화 '리쿠르트'는 아무래도 CIA라는 조직에 대해 기존의 다른 영화들 보다는 보다 현실적인 것이 아닐까하고 추측되는 것이다.
이런 '현실성'은 역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어떤이는 '세상은 결국 혼자 사는거야.'라고 말하고, 어떤이는 반대로 '세상은 같이 살아가는거야.'라고 말한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때 이 영화가 '자기 자신만을 믿으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제임스 클레이튼이라는 인물이 동료이자 연인인 레이나를 믿는 마지막 선택은 '결국 사람을 믿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같기도 하다. ―레이나가 정말 제임스 클레이튼과 연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서로의 관계가 진심과 기만을 뒤섞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사람을 믿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뒷끝이 개운치 않은 것은 여전하다. 사람을 믿는다는 행위 자체도 '이 사람을 믿어도 되겠다'라는 '자기 확신'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타인에 대한 신용(信用)'도 결국 '스스로를 믿는 행위'이지 타인을 믿는것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낼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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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도] S1. His Concern
이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미리 밝혀두지만, 나는 비교적 보수적이고 유교적 문화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섹스(sex)에 대한 얘기를 남앞에서 하는것 자체를 터부(taboo)시 하는 편이다. 하지만 주로 그 '섹스'에 대해, 혹은 그에 연관된 '사랑'에 대해 다루고 있는 영화 '오감도'에 대해 글을 쓰고자 마음먹었기에 나 스스로의 금기(?)를 이번만큼은 깨보기로 했다.
나는 사실 영화 '오감도'를 극장에서 보지는 않았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극장에서 볼 생각은 전혀 없었고, 그 이후에라도 찾아서 볼 생각조차 없었다. 이 영화는 '에로스(eros), 그 이상의 사랑 이야기', '사랑의 편견을 벗어라!'라는 문구로 어느 정도의 선정성을 내세워 홍보를 했고, 그것이 영 내 취향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팀 직원들과 퇴근 후 영화를 보곤 했었는데, 팀 직원중 한명이 '오감도'를 추천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접하게 된 케이블TV를 통해서였다. 다소 부정적이었던 영화에 대한 기대치와는 달리, ―내 감정의 기복 탓일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의 첫번째 세그먼트(segment)는 긍정적인 측면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오감도'는 총 5개의 에피소드(episode, 혹은 세그먼트)로 구성되어있는 옴니버스 영화다. 이 글에서는 첫번째 에피소드인 'His concern'에 대해서만 다루도록 하겠다.―
'His concern'은 조각같은 외모와 쉴세없이 돌아가는 잔머리와는 다르게 여자앞에서는 쑥맥인 한 '남자', 그리고 시크(chic)한 매력을 가진 큐레이터인 '그녀'의 첫 만남과 두 번째 만남, 그리고 하룻밤의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두 남녀의 독백(獨白)이다. 그 중 대표적인 몇가지를 꼽자면 다음과 같다.
"혼자 다니는 사람에게 좌석 티켓이라는 것은, 어쩌면 일종의 즉석복권일지도 모른다."
현실에서도 혼자 다니는 사람에게 옆에 앉게 될 사람은 매우 중요하다. 즐거운 마음으로 여행을 시작했으나, 너무나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사람이 옆에 앉는다고 상상해 보자. 그 얼마나 곤욕스러운 일인가? 10분의 동행이 10시간 같을 것이고, 심지어 숨쉬기 조차도 곤욕스러울 것이다.
반면, 약간은 침울하게 시작한 여행이라 할지라도, 옆에 앉은 사람이 유쾌하고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긴 시간의 이동도 지극히 즐거운 일일 것이다.
이점은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와 같이 일하는 사람, 혹은 배우자, 삶의 곳곳에서 부딪히거나 엮일 사람을 내 의지대로 선택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삶의 질이 천차만별이 되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그 사람들이 나의 "복권(福卷)"이라 할만 하다.
"그녀와 섹스를 해서 좋은 것이 아니라 그녀와 섹스를 하는 사이라서 좋은 것이라면 사랑이라 부를만한다."
앞서 밝혔듯, 이 말은 내가 지극히 터부시 하던 영역에 해당하는 대사다. 하지만 이 대사는 근래 하고 있는 한가지 고민에 괜찮은(?) 답을 해주고 있다.
그 동기는 불분명하지만, 근래 '사랑'이라는 말과 행동, 그 감정의 정체에 대해 원론적으로 생각해보고 있다. 어떤 철학자는 사랑의 근본을 '희생'이라고 했고, 어떤이는 '섹스'라고도 했다. 이것은 정신적인 것이냐, 육체적인 것이냐에 대한 것인데 이들은 모두 내 기준에 명확한 정의는 아니었다. '희생'으로 시작된 '사랑'이라 할지라도, 남녀간의 사랑이라면 육체적으로 끌릴 수도 있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사랑'이 아닌것은 아니다. '섹스'라는 행위 자체 만으로는 번식의 본능을 설명할 수 있겠지만 '사랑'이라 부르기엔 부족함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했을 때, '사랑'에 대해 객관적으로―'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객관적일 수 없는 개념일지 모른다. 여기서는 어디까지나 '비교적' 객관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정의하기 위해서는 '육체적'요소와 '정신적' 요소가 적절히 조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이 대사는 비교적 명쾌하게 기준선을 제시해준다. '섹스'라는 행위 자체에 대한 감정이 '사랑'인지 여부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섹스의 대상'에 따른 감정이 '사랑'인지 여부를 결정짓는 것이라면, 내 고민에 대한 납득할 만한 답이 된다라는 판단이 선 것이다. '섹스'라는 행위 그 자체가 좋은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의 섹스'이기 때문에 좋은 것이라면,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하기에 충분한 것이 아닐까?
'오감도'라는 영화가 평단이나 관객으로부터 그리 좋은 평가를 받은 영화는 아닌것 같다. 사실 나는 영화의 극히 일부분(약 20% 수준)만을 본 것이고, 그 부분에서 역시 '감동'에 가까운 느낌을 받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내가 본 그 일부분의 영화에서는 어느정도 곱씹어 볼 이야기들이 있었고, 다른 사람들도 그 대사 하나하나를 곱씹어볼만 하다 이야기할 수는 있다. 그리고 인류가 영원히 정의하기 어려울 일이겠지만, '사랑'이라는 개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기를 권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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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씨
이 소설은 부와 가난, 보수주의와 박애주의, 돈과 노동과 인간 본성에 관한 이야기다. 언론을 통해서 본 바로는, 돈이 곧 권력이 된 현대사회를 풍자와 해학으로 표현해내는 작가 거트 보네거트의 능력이 듬뿍 담긴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는 로즈워터라는 가문을 통해 미국의 자본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부를 집중시키고, 빈곤한 소외계층을 대규모로 양산해왔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또 로즈워터 가문의 상속자인 엘리엇이라는 '독특한' 인물이 부의 집중과 소외계층 양산을 어떻게 완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하나의 방편을 제시한다. (소설에서는 그 과정과 그에 따른 난관을 여러가지 화제를 통해 제시하고 있지만, 여기서 그 구체적 내용은 논외로 하겠다.)
이 소설은 궁극적으로 '수정 자본주의' 혹은 '자본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반면 나는 객관적인 관점에서 봤을때 보수주의자에 가깝다. 하지만 나 역시 '순수 자본주의'에서 비롯되는 극심한 부의 편중이 가져오는 부작용에 대해 깊이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동의를 표한다. 하지만 엘리엇의 마지막 선택은 여전히 충격적이다. 이것은 나의 생각도 여전히 '고루한'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이겠지만, 소설의 '주제'에 동의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렇다는 것은 아무래도 작가의 상상력, 혹은 작가가 설정해 놓은 엘리엇의 진보성이 나를 훨씬 뛰어 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나보다 좀더 보수주의적이고, '순수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한번쯤 읽어보라고 권해보고 싶다. 단! 작가의 화법이 매우 '비유적'이기에 비정상 취급받는 정상인을 서술하는 부분에서는 스스로가 너무나 비정상적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으니 '살짝' 각오하고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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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셉션] 호접몽(胡蝶夢). 그 이상의 상상력
호접지몽(胡蝶之夢). 이것은 장자(莊子)가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는데, 나비가 장자인지 장자가 나비인지 분간하지 못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이말은 또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 또는 인생의 무상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인셉션'이라는 영화를 한마디로 "호접몽이라는 동양의 고사성어를 헐리우드식의 표현으로 시각화 시킨 영화"라고 정의하고 싶다.
크리스토퍼 놀런이라는 이 놀라운 감독은 인셉션에서 '드림머신'이라는 상상속의 이기를 통해 '꿈'이라는 추상적인 존재를 형상화시켰다. 또 꿈과 현실에 대한 시간적 분석, 기억과 꿈의 관계에 대한 독특한 해석으로 꿈속의 놀라운 세상을 시각화하고 극화(劇化)하는데 성공했다.
사실 이 영화는 줄거리 자체의 심오함보다는 '꿈'과 '현실'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한다. 연일 화제가 되고 있는 감독의 독특한 상상력과 시각효과는 그 '생각'을 가속화하는 하나의 디딤돌 역할을 할 뿐이다. '과연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가?', '현실의 기억과 꿈. 그것들이 반영돼 다시 현실이 되는 꿈속'에 대한 다소 철학적인 생각들?
전반적으로 영화의 전개를 따라가는것이 다소 '머리아팠'지만, 그 과정에서 갖게 되는 생각의 깊이도 상당히 깊었고, 그 생각의 내용 역시도 매우 건전했으며, 눈에 보이는 비쥬얼(visual) 역시도 만족스러웠기에 누가 영화에 대해 물어본다면 "만족스러운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꿈의 밑바닥이라고 하는 개념, 꿈속에서의 죽음과 약물의 사용에 대한 관계는 영화가 끝날때까지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어 아쉬움이 남았다. 사실 이 내용에 대한 설명이 영화속에 있었지만, 극의 논리적 타당성을 밝히기 위한 그야말로 "설명"의 성격이 강했다. 또 주인공의 입을 통해 이루어진 '빠른 설명'이었기 때문에 다소 생각이 느린 나로서는 그 내용을 모두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래도 그 설명들에 대해 약간이나마 더 시간을 할애해서 설명했다면 영화의 보다 심오한(?) 의미를 공감하는데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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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사치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누구나 시쳇말로 '귀에 딱지가 지도록' 들어왔을 것이다. 이제 곧 서른줄에 접어드는 나 역시도, 지금 시점에서는 그 점에 대해 100%는 아니더라도 99.5%정도는 공감하고 있다.
나는 얼마전 라디오에서 '독서사치'라는 말을 들을수 있었다. 정독, 통독, 속독 등의 독서 분류는 들어봤지만 '독서사치'라는 말은 나에게 알듯 말듯한 호기심의 대상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사치스러운 독서. 찾아보니 이 말은 김영하씨의 산문집 "랄랄라하우스"에 나오는 말이었다. 이른바 '현장독서법'이라 부를 만한 방법으로 어떤 책을 그 내용에 어울릴 만한 장소에서 읽는 것이다. 에밀리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읽으러 영국 요크셔로, 존 크라카우어의 걸작 논픽션 '희박한 공기속으로'을 읽으러 에베레스트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러 로마로, '바다의 도시이야기'나 '베니스에서 죽다'를 읽기 위해서라면 베네치아로.
정말 이대로라면,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만한 호사가 없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그것이 가능할까? 아마도 십중팔구, 아니 백에 아흔아홉은 어렵다 말할것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있어서의 '독서사치'는 어떤것일까? 일단 생계와 관련된 모든 일을 잠시 제쳐두고, 읽고 싶은 책을 골라, 편안한 소파에 앉아 읽는것. 그리고 잠시 잠깐 잠들었다 다시 읽고, 차 한잔을 곁들이는 그런 것. 이런것이야 말로 나에게 더할 나위없는 독서 사치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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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 스님의 주례사
언젠가부터 웹서핑(web surfing)은 내 생활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 그 과정에서 좋은 정보도 얻고, 정말 쓸데 없는데에 시간을 버리기도하고, 가끔은 기쁘고, 가끔은 불쾌하기도 한 정보들을 얻기도 한다. 아마도 그것은 나 뿐만 아니라 컴퓨터를 사용할줄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닐가?
오늘 웹서핑 도중 좋은 글을 하나 접하게 됐다. 법륜 스님의 주례사라고 하는데, 말인 즉 구구절절이 옳다. 하긴 어느 주례가 신랑 신부 앞에서 그른 말을 할 것이며, 어느 성직자가 대중 앞에서 나쁜 말을 할까만은, 특히 이 주례사는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것 같아 여기에 옮겨본다. 물론 결혼을 멀리 앞에 둔 사람이라면 받아들여지는 바가 상대적으로 적겠지만, 결혼 적령기나 기혼자들은 한번쯤 곱씹어 볼만한 이야기들이 아닐까 한다. 물론 아직까지도 결혼에 대한 환상이 남아 있는 '철없는' 나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아래는 내가 읽었던 주례사의 전문이다. ------------------------------------------------------------------------------
오늘 두 분이 좋은 마음으로 이렇게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결혼을 하는데, 이 마음이 십년, 이십년, 삼십년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기 앉아 계신 분들 결혼식장에서 약속한 것 다 지키고 살고 계십니까? 이렇게 지금 이 자리에서는 검은머리가 하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거나,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서로 돕고 살겠는가 물으면, '예' 하며 약속을 해놓고는 3일을 못 넘기고 3개월, 3년을 못 넘기고 남편때문에 못살겠다, 아내 때문에 못살겠다 이렇게 해서 마음으로 갈등을 일으키고 다투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결혼하기를 원해 놓고는 살면서는 "아이고 괜히 결혼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안 하는 게 나았을걸"하며 후회하는 마음을 냅니다. 그럼 안 살면 되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약속을 해놓고 안 살수도 없고 이래 어영부영하다가 애기가 생기니까 또 애기 때문에 못하고, 이렇게 하면서 나중에는 서로 원수가 되어 가지고, 아내가 남편을 아이고 웬수야 합니다. 이렇게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고생 고생하다가 나이 들면서 겨우 포기하고 살만하다 싶은데, 이제 또 자식이 애를 먹입니다. 자식이 사춘기 지나면서 어긋나고 온갖 애를 먹여 가지고, 죽을 때까지 자식 때문에 고생하며 삽니다.
이것이 인생사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결혼할 때는 다 부러운데, 한참 인생을 살다보면 여기 이 스님이 부러워, 아이고 저 스님 팔자도 좋다 이렇게 됩니다. 이것이 거꾸로 된 것 아닙니까? 스님이 되는 것이 좋으면 처음부터 되지, 왜결혼해 살면서 스님을 부러워합니까? 이렇게 인생이 괴로움 속에 돌고 도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제가 그 이유를 말할 테니, 두 분은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처럼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서로 이렇게 좋아서 결혼하는데 이 결혼할 때 마음이 어떠냐, 선도 많이 보고 사귀기도 하면서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이것저것 따져보는데, 그 따져보는 그 근본 심보는 덕 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돈은 얼마나 있나, 학벌은 어떻나, 지위는 어떻나, 성질은 어떻나, 건강은 어떻나, 이렇게 다 따져 가지고 이리저리 고르는 이유는 덕 좀 볼까 하는 마음입니다. 손해볼 마음이 눈꼽만큼 도 없습니다. 그래서 덕볼 수 있는 것을 고르고 고릅니다. 이렇게 골랐다는 것은 덕보겠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니 아내는 남편에게 덕보고자 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덕보겠다는 이 마음이, 살다가 보면 다툼의 원인이 됩니다. 아내는 30%주고 70% 덕보자고 하고, 남편도 자기가 한 30%주고 70% 덕보려고 하니, 둘이 같이 살면서 70%를 받으려고 하는 데, 실제로는 30%밖에 못 받으니까 살다보면 결혼을 괜히 했나 속았나 하는 생각을 십중팔구는 하게 됩니다. 속은 것은 아닌가, 손해봤다는 생각이 드니까 괜히 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 덕보려는 마음이 없으면 어떨까? 좀 적으면 어떨까요? "아이고 내가 저분을 좀 도와 줘야지, 저분 건강이 안 좋으니까 내가 평생 보살펴 줘야겠다. 저분 경제가 어려우니 내가 뒷바라지 해줘야겠다, 아이고 저분 성격이 저렇게 괄괄하니까 내가 껴안아서 편안하게 해줘야겠다." 이렇게 베풀어줘야겠다는 마음으로 결혼을 하면, 길가는 사람 아무하고 결혼해도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덕 보겠다는 생각으로 고르면, 백 명 중에 고르고 고르고 해도, 막상 고르고 보면 제일 엉뚱한 걸 고른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옛날 조선시대에는 얼굴도 안보고 결혼해도 잘 살았습니다. 시집가면 죽었다 생각하거든. 죽었다 생각하고 시집을 가보니 그래도 살만하니까 웃고 사는데, 요새는 시집가고 장가가면 좋은 일이 생길까 기대하고 가보지만 가봐도 별 볼 일이 없으니까, 괜히 결혼 했나 후회가 됩니다. 결혼식하고 몇일 안 돼서부터 후회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은 결혼하기 전부터 후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랑신부가 둘이서 혼수 구하러 다니다가 의견차이가 생겨서 벌써 다투게 됩니다. 심지어는 안 했으면 하지만 날짜 잡아놔서 그냥 하는 사람들도 제가 많이 봅 니다 .
오늘 이 자의 두 사람이 여기 청년 정토회 에서 만나서 부처님 법문 듣고 했으니까, 제일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부터는 덕 보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됩니다. 내가 아내에게, 내가 남편에게 무얼 해줄 수 있을까, 내가 그래도 저분하고 살면서 저분이 나하고 살면서 그래도 좀 덕 봤다는 생각이 들도록 해줘야 않느냐, 이렇게만 생각을 하면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심보를 잘못 가져놓고 자꾸 사주팔자를 보려고 합니다. 궁합본다고 바뀌는 게 아닙니다. 바깥 궁합 속 궁합 다보고 삼 년을 동거하고 살아봐도 이 심보가 안 바뀌면 사흘 살고 못삽니다. 그러니 이 하객들은 다 실패한 사람들이니까 괜히 둘이 잘살면 심보를 부립니다. 남편에게 '왜 괜히 바보같이 마누라에게 쥐어 사나, 이렇게 할 것 뭐 있나'하고, 아내에게는 '니가 왜 그렇게 남편에게 죽어 사나, 니가 얼굴 이 못났나 왜 그렇게 죽어 사노' 이렇게 옆에서 살살 부추기며, 결혼할 땐 박수 치지만 내일부터는 싸움을 붙입니다. 이런 말은 절대 들으면 안됩니다. 이것은 실패한 사람들이 괜히 심술을 놓는 것입니다. 남이 뭐라고 해도 "나는 남편에게 덕되는 일 좀 해야 되겠다. 남이 뭐라 그러든, 어머니가 뭐라 그러든 아버지가 뭐라 그러든, 누가 뭐라 그러든 나는 아내에게 도움이 되는 남편이 되어야겠다." 이렇게 지금 이 순간 마음을 딱 굳혀야 합니다. 괜히 애까지 낳아놓고 나중에 이혼한다고 소란 피우지 말고 지금 생각을 딱 굳혀야 됩니다.
신랑 신부는 그렇게 하시겠어요? 덕 봐야 돼요? 손해 봐야돼요? '손해보는 것이 이익이다' 이것을 확실하게 가져야 합니다.
오늘 두분 결혼식에 참여한 사람들은 반성 좀 해야합니다. 이렇게 두 분의 마음이 딱 합해지면, 어떻게 되느냐, 아내의 오장육부가 편안해집니다. 이 오장육부가 편해지면 어떻게 되느냐, 임신해서 애기를 갖게 될 때 영가들도 죽을 때 초조 불안해 죽은 귀신도 있고, 편안하게 도 닦다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편안한 데는 편안한게 인연을 맺어오고, 초조불안하면 초조 불안한 게 딱 들어옵니다. 그래서 이것을 잉태라고 합니다. 태교가 아니고, 잉태할 때 여자가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서 잉태를 하면 선신을 잉태를 하고, 심보가 안 좋을 때 잉태를 하면 악신을 잉태합니다. 처음에 씨를 잘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결혼해 가지고 덕보려고 했는데 손해를 보니까, 심사가 뒤틀려 있는 상태에서 같이 자다보니 애가 생깁니다. 기도하고 정성 다해서 애가 생기는 것이 아니고, 그냥 둘이 좋아 가지고 더부덕덥덥 하다보니까 애기가 생겨버립니다. 그러니 이게 처음부터 태교가 잘못됩니다. 이렇게 잉태해 가지고는 성인 낳기는 틀린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밥 먹고 짜증내고 신경질 내면, 나중에 위를 해부해보면 소화가 안되고 그냥 있습니다. 이 자궁이라는 것은 어머니의 오장육부하고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짜증을 내면 오장육부가 긴장이 되어있습니다. 안에 있는 애기가 늘 긴장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선천적으로 신장질환이 생기든지 이이가 불안한 마음을 갖습니다. 엄마가 편안한 마음을 갖고 있고 원기가 늘 따뜻하게 돌고, 애기가 그안에 있으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 아이는 나중에 태어나도 선천적으로 도인처럼 편안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어떻든, 세상이 어떻든 애를 가진 이는 편안해야합니다.
편안하려면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내가 편안한 것은 누구의 영향을 받느냐 바로 남편의 영향을 받습니다. 남편이 애는 좋은 애를 낳고 싶으면서 아내를 걱정시키면 좋은 아이를 낳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내가 애를 가졌다고 하면 집에 일찍 들어오고, 나쁜 것은 안 보여주고, 늘 아껴주고 사랑해줘서 거들어 줘야합니다. 시어머니들도 손자는 좋은 것을 보고 싶은데, 며느리를 볶으면 손자가 나쁜 애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며느리가 편안하도록 해줘야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본인이 편안한 것이 제일 좋고, 주위에서도 이렇게 해줘야합니다. 이렇게 정신이 중요하고, 두 번째는 음식을 가려먹어야 합니다. 육식을 조금하고 채식을 많이 하고, 술 담배를 멀리하고 이렇게 해야 애기가 좋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애기를 낳은 후에 아무것도 모른다고 둘이서 서로 싸운다면 안됩니다. 한국에서 태어나면 한국말 배우고, 미국에서 태어나면 미국말 배우고, 일본에서는 일본말 배우고, 원숭이 무리에서 자라면 원숭이 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어릴 때 부모가 하는 것을 그대로 본받아서 아이의 심성이 됩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애기가 조그만 하다고 애기를 옆에 두고 둘이서 짜증내고 다투면, 사진 찍듯이 그대로 아기 심성이 결정이 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술 주정하고 그러면 아이가 나는 크면 절대로 그렇게 안 할거야 하지만 크면 술 주정합니다. 다투는 집에서 태어나면 자기는 크면 절대로 다투지 않겠다고 하지만 크면 다투게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로 모방해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애기를 낳으려면 직장을 다니지 말아요. 아니면 3년은 직장을 그만두어요. 아니면 애기를 업고 직장에 나가든지. 이렇게 해서 아이를 우선적으로 해야합니다. 아이를 우선적으로 하려면 아이를 낳고, 안 그러려면 안 낳아야 합니다. 안 그러면 아이가 복 덩어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인생을 망치는 고생덩어리가 됩니다. 애 때문에 평생 고생하고 살게됩니다. 3년까지만 하면 과외 안 시켜도 괜찮고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제 말 잘 들으십시오. 이렇게 안 하려면 낳지를 말고 낳으려면 반드시 이렇게 하십시오. 그래야 나도 좋고 자식도 좋고 세상도 좋습니다. 잘못 애 낳아서 키워놓으면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반드시 이것을 첫째 명심하십시오. 가정에서 이것이 첫째입니다.
두 번째, 제가 신도 분들 많이 만나보면, 애 때문에 시골 살면서 남편 떼어놓고 애 데리고 서울로 이사가는 사람, 애 데리고 미국에 가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절대 안됩니다. 두 부부는 애기 세살 때까지만 애를 우선적으로 하고 그 이후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남편은 아내, 아내는 남편을 우선으로 해야합니다. 애기는 늘 이차적으로 생각하십시오. 대학에 떨어지든지 뭘 하든지 신경쓰지 마십시오. 누가 제일 중요하냐? 아내요, 남편이 첫째입니다. 남편이 다른 곳으로 전근가면 무조건 따라 가십시요. 돈도 필요 없습니다. 학교 몇 번 옮겨도 됩니다. 이렇게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중심으로 놓고 세상을 살면 아이들은 전학을 열 번 가도 아무 문제없이 잘삽니다. 그런데 애를 중심으로 놓고 오냐오냐하면서 자꾸 부부가 헤어지고 갈라지면, 애는 아무리 잘해줘도 망칩니다.
여기도 그렇게 사는 사람 있을 것입니다. 오늘부터 정신차리십시오. 제 얘기를 선물로 받아 가십시오. 이렇게 해야 가정이 중심이 서고 가정이 화목해집니다. 이렇게 먼저 내가 좋고 가정이 화목한 것을 하면서 내가 사는 세상에도 기여를 해야합니다. 우리만 잘산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늘 내 자식만 귀엽게 생각말고, 이웃집 아이도 귀엽게 생각하고, 내 부모만 좋게 생각하지 말고 이웃집 노인도 좋게 생각하고, 이런 마음을 내면 어떠냐, 내가 성인이 되고 자식이 좋은 것을 본받습니다.
그리고 부모에게 불효하고 자식에게 정성을 쏟으면 반드시 자식이 어긋나고 불효합니다. 그런데 늘 자식보다는 부모를, 첫째가 남편이고 아내고, 두 번째는 부모가 돼야 자식이 교육이 똑바로 됩니다. 애를 매를 들고 가르칠 필요없이, 내가 늘 부모를 먼저 생각하면 자식이 저절로 됩니다. 그러니까 애를 키우다 나중에 저게 누굴 닮아 그러나 하면 안됩니다. 누굴 닮겠습니까? 둘을 닮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나쁜 인연을 지어서 나쁜 과보를 받아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반드시 인연을 잘 지어서 처음에 조금만 노력하면 나중에 평생 편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두 부부는 서로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려고 해야합니다. 자식을 낳으려면 잉태 할때와 뱃속에 있을 때, 세살 때까지가 중요하니 마음이 편안해야 하고 부부가 화합해야 합니다. 주로 결혼해서 틈이 생길 때 애가 생기고, 저 남자와 못살겠다 할 때, 애기를 키우기 때문에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면, 부모에게 저항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애가 중학교까지 잘 다니다가 고등학교 가더니 그렇다, 친구 잘못 사귀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납니다. 그러니 이미 애기가 그렇게 되었거든 지금 엎드려서 참회를 하여야 고쳐집니다. 지금 이 부부는 안 낳았으니까 반드시 그렇게 낳아야 합니다.
세 번째 남편을 아내를 서로 우선시 하고 자식을 우선시 하지 않습니다. 첫째가 남편이나 아내를 우선시하고 둘째가 부모를 우선시하지, 남편이나 아내보다도 부모를 우선시 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옛날 이야기입니다.
일단 아내와 남편을 우선시 할 것, 두 번 째 부모를 우선시 할 것, 세번째 자식을 우선시 할 것, 이렇게 우선 순위를 두어야 집안이 편안해집니다. 그러고 나서 사회의 여러 가지도 함께 기여를 하셔야 합니다.
이러면 돈이 없어도 재미가 있고, 비가 새는 집에 살아도 재미가 있고, 나물 먹고 물 마셔도 인생이 즐거워집니다. 즐겁자고 사는 거지 괴롭자고 사는 것이 아니니까, 두 부부는 이것을 중심에 놓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남편이 밖에 가서 사업을 해도 사업이 잘되고, 뭐든지 잘됩니다. 그런데 돈에 눈이 어두워 가지고 권력에 눈이 어두워 가지고, 자기 개인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가지고 자기 생각 고집해서 살면 결혼 안 하느니보다 못합니다.
그러니 지금 좋은 이 마음 죽을 때까지 내생에까지 가려면 반드시 이것을 지켜야 합니다. 이렇게 살면 따로 머리 깎고 스님이 되어 살지 않아도, 해탈하고 열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대승보살의 길입니다. 제가 부주 대신 이렇게 말로 부주를 하니까 두 분이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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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CEO의 8대 조건
이전의 포스팅에서도 잠깐 언급한적이 있지만, 유명한 CEO들과 그들에 성향에 대해 약간의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재물'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나의 '속됨'을 증명하는 것인지, 그들의 사회적 성공을 동경하는 자의 모습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요즘 싸이에 있는 미니홈피(http://cyworld.com/bluesn)와 블로그(http://maverick.xtorm.net)를 분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주로 블로그를 활용하되, 미니홈피는 말 그대로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를 쓰는 공간으로 활용하거나, 블로그에 올리기는 조금 껄쩍지근한 글들을 올리는데 사용하기 위해서다. 미니홈피를 정리하던 중, 그곳에 스크랩해뒀던 유명 CEO관련 기사중 다시봐도 흥미로운 것이 있어 다시 여기에 포스팅을 하고자 한다.
성공한 CEO들의 성향을 분석한 것인데, 별다른 첨언이 없더라도 있는 그대로가 우리에게 도움될만한 기사가 아닌가 한다.
칼리 피오리나는 휴렛패커드 최고경영자(CEO)로 재직하면서 괜찮은 경영자로 불렸다. 하지만 컴팩 인수에 대한 책임과 실적 부진으로 명품 CEO가 되지는 못했다. 반면 잭 웰치,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등은 탁월한 기업 실적과 함께 직원들의 신망까지 얻으면서 명품 CEO가 됐다.
LG경제연구원이 24일 '명품 CEO의 조건' 보고서를 통해 명품 CEO가 되기 위한 조건을 8개 항목으로 정리했다.
1. 선견지명 미래를 한발 앞서 예측해 준비하고 적응할 수 있는 선도력이 필요하다. 경영자는 큰 눈으로 비전을 보고 입체적으로 사고해야 하며 동물적 감각과 직관으로 판단하고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2. 창의성 경영자의 창의적 능력은 회사의 미래를 결정하는 힘이다. 스티브 잡스 애플 CEO가 대표적이다. 그는 평소 새로운 것을 중시하며, 기술보다는 디자인과 창의성을 강조했다.
3. 용병술 아무리 슈퍼맨 같은 CEO라도 혼자서 모든 것을 다할 수 없다. 빼어난 인재를 선별해 내고 이들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용병술을 겸비해야 한다. 빌 게이츠는 스티브 발머라는 경영 천재를 삼고초려를 통해 자신의 오른팔로 만들었다.
4. 인간미 경영자에게 있어 진정한 인간미는 따뜻하고 순수한 가슴으로 구성원들을 감싸 안아주는 배려를 뜻한다. 구성원들을 긍정의 힘으로 변하게 하는 칭찬, 경영자에 대한 깊은 신뢰와 존경심을 형성하는 겸손 등 3박자를 고루 갖춰야 한다.
5. 배움에 대한 열정 바쁘다는 것을 핑계로 경영자가 공부를 게을리하면 회사는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한다. 월마트 설립자 샘 월튼은 현장을 순회하며 직원들과 대화하는 것을 즐기며, 마이크로소프트(MS)의 빌 게이츠는 현장 구성원들이 작성한 생생한 제안서를 읽으면서 학습의 시간을 가졌다.
6. 넘치는 활력과 정력 몸과 마음이 건강하지 못한 CEO는 쏟아지는 스트레스의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
7. 정직한 품성과 도덕성 경영자는 한치 흐트러짐 없이 정도를 걸어야 한다. 정직한 품성과 도덕성을 갖추는 것은 존경받는 경영자의 근간이다.
8. 사회적 책임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기업이 장기적으로도 성공할 확률이 높다. 경영자도 지도층에게 요구되는 솔선수범과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이행해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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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아이] 감성이 배제(排除])된 기술에의 회의
누구에게나 '지금까지 봤던 영화중에 기억에 남는 것을 딱 하나만 꼽아보라'면 쉽게 대답하기 어렵겠지만, 그 후보에 들만한 영화들의 경우라면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그 후보중 하나로 꼽을수 있는 것이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Enemy Of The State)'다. 거의 10년전, 수능을 치른 직후에 본 영화지만 아직도 그 영화가 기억에 남는 이유는 문명의 산물(産物)들이 사회 구성원 개개인을 감시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는 다소 섬뜩한 설정때문이다. 공학의 일종(정확히는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자 했던 나에게 기술의 순기능과 역기능에 대해 다소 진지하게 생각하게 했던 첫번째 영화였던것이다.
국가 보안과 관련된 첩보 활동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기(利器) 이상의 것들이 활용되고 있다는 점과 영화로부터 이미 10년의 시간이 경과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에서의 설정은 벌써 현실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 '이글 아이(Eagle Eye)'는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한단계 뛰어넘고 있다. 나는 처음 영화 제목과 간단한 줄거리 소개만을 보고 '멀리 있는 먹이를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도 유명한 독수리의 뛰어난 시력'만을 생각했다. 단순히 '뛰어난 감시 체계'에 대한 영화일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의 '이글 아이', 컴퓨터 '아이다'는 오히려 영화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의 '스카이넷'과 닮아있다. 정보 수집 능력과 상황 판단 능력,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의지와, 그 의지를 실현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지금의 기술 발전 속도로 본다면, '이글 아이'의 '아이다'나 '터미네이터'의 '스카이넷'이 꿈만 같은 얘기는 아니다. 또한 공학을 전공한 엔지니어의 한 사람으로서, 기술의 발전 방향이 '보다 사람에 가까운, 그리고 유사한 모습'을 띄게 하는 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어쩌면 '이글 아이'의 '아이다'나 '터미네이터'의 '스카이넷'이 "순수 기술"이 지향하는 '궁극의 컴퓨터'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생각해야 할 점은 '인간이 어떻게 인간의 피조물(被造物)과 차별화 되냐'는 것이다. 나의 짧은 생각으로는 그것이 "감성(感性)"과 "의지(意志)"에 있지 않나 싶다. 인간은 수치적으로 계산되는 손실을 감수하고라도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랑"과 "희생"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인간은 "꿈"을 꾸고, 그 꿈을 실현하려는 "의지"를 통해 스스로를 발전시켜 나감으로서 다른 존재들과의 차별을 이룬다. 우리가 기술을 이용해 우리의 피조물에 '감성'이나 '의지'를 주입시키면 어떻게 될까. 사실 감성을 제대로 주입시키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영화 'A.I'에서의 데이빗처럼 인간의 동반자가 될수 있는 존재가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 물론 삐뚤어진 감성을 가진 피조물은 예외다 ― 하지만 감성 없이 의지만을 주입시킨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재앙 속으로 몰아 넣을 수 있다. 대부분의 피조물은 인간이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도구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인간보다 강인하다. 온갖 기계는 육체적 한계를, 각종 정보기기는 '망각'과 '속도'라는 두뇌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인 것이다. 이런 피조물에 '감성'없는 '의지'만을 부여한다면, 인간은 오히려 피조물에게 '정복의 대상'이 되기 쉽다. 인간의 '감성'에 의해 빚어지는 각종 비효율이 우리 피조물의 계산적 판단으로 본다면 매우 못마땅한 것이 될것은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비효율을 불러오는 '감성'이야 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장 큰 차별성이기에, 인간 스스로 그것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점을 반복해 부연(敷演)해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 엔지니어는 기술 발전의 상한에 선을 긋고, 스스로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끊임없이 반문(反問)해야 한다. 앞선 포스팅에서도 주장했듯, 감성과 도덕성이 결여된 기술은 인간 스스로에 대한 '흉기(凶器)'일 뿐인 것이다.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긴장감있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또한 초반에 '중강(中强)' 수준의 액션을 보여주고, 늘어질만 하면 한번씩 긴장감을 조여줄만한 액션을 반복해서 보여준다는 '헐리웃 액션 영화의 법칙'도 성실하게 지켜주고 있어, 러닝타임(running time)내내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받은 느낌이다. 또한 '트랜스포머'에서 유약하고 어리게만 보았던 '샤이아 라보프'의 연기도 기대 이상이었고, 내용상으로도 엔지니어인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단 개인적으로 한가지 아쉬운점이 있다면 액션 장면들이 과대(過大)하고 빨라 '정신없다'라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점은 액션 영화를 즐기는 사람입장에서 보면 '가당찮은 투정'에 불과할 수 있다는 점도 알고는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 취향'에 근접한 문제이므로 꿋꿋이 '투정어린 불만'을 늘어놓은 것으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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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그와트, 그 7년간의 연대기
"해리 포터 시리즈"에 대한 얘기는 수년전부터 익히 들어왔다.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는 소설이라며 한번쯤 읽어보길 권했지만, 그 당시만해도 판타지나 무협 소설에 큰 흥미가 없었던 나에게 그것은 큰 흥미거리가 되지 못했다. 베스트셀러이니, 스테디셀러이니 해도 나의 관심을 크게 끌지 못했던 '해리 포터 시리즈'의 줄거리를 처음 접한 것은 영화화된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봤을 때였다. 당시에는 다소 냉담하게 영화를 접했음에도 불구하고 꽤 흥미롭게 영화를 봤던 기억이 난다. ― 결국 그후, DVD를 구입해 영어 공부 목적으로 '해리포터 마법사의 돌'을 30번이상 반복 시청하기도 했다. ―
나는 최근 이동중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읽을 거리'를 찾던중 우연히 파일로 된 "해리포터 시리즈"를 발견했다. 여전히 무협이나 판타지를 그렇게 높이 평가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핸드폰에 저장해 가볍게 읽을 것이었기에 한번 읽어보기로 하고 해리포터 전권을 읽기 시작했다. 물론 그 사이에 여러편의 '해리 포터 시리즈' 영화를 봤었는데, 영화와 다르거나 영화에서 생략되었던 내용들을 찾아내며 읽는 재미가 나름 쏠쏠해 의외로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물론 영화를 먼저 본데 따른 부작용도 있었는데, 영화화된 장면들이 책을 읽으면서 얻게 되는 상상력에 한계로 작용하기도 했던 것이다. 특히 인물의 모습을 상상하기가 힘들었는데, 이는 아마도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인상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이리라.
첫 번째인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부터, 마지막인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까지를 모두 읽고난 뒤의 첫 느낌은 "해리포터"시리즈가 "독자와 같이 성장하는 소설"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정확히 주인공 3인방(해리 포터, 론 위즐리, 헤르미온느 그레인저)과 같은 나이로, 그리고 그들과 같이 나이 먹어 가는 독자들과 같은 나이로 말이다. 주인공 3인방이 호그와트에서 지내는 동안의 연대기(年代記)라라고 할까?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에서는 마냥 '판타지 동화'같기만 하던 내용이 편을 거듭하면서 생각할 거리가 많아지더니, 후반부인 "해리 포터와 혼형 왕자",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에 이르러서는 운명과 죽음, 심지어는 호접몽(胡蝶夢)을 연상케 하는 장면까지 있는 것이다.
"운명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비교적 흥미와 재미 위주의 줄거리를 보여주던 전반부와는 달리 후반부의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그중의 하나가 '운명'에 대한 것이다. 후반부에 덤블도어에 의해 언급되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주인공 해리가 볼드모트와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예언으로부터 이 소설의 내용은 시작된다. 예언을 전해 들은 볼드모트가 해리를 살해하려다 실패했고, 해리의 부모가 대신 그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자라면서 그런 사실을 깨달은 해리와 그의 친구들은 부모의 원수를 갚고자 더욱 볼드모트와 격하게 맞서 싸웠지만, 자신이 볼드모트를 제거할 수 있다는 예언을 모두 듣는 순간 고민에 빠진다. 자신이 볼드모트와 싸우는 것은 자신의 운명이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그것은 그에게 '볼드모트와의 싸움'이라는, 피할수 없는'의무'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덤블도어는 그에게 작지만 중요한 깨달음을 요구한다. '운명이라는 것은 결국 정해져 있는 것이 아리고 스스로가 선택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볼드모트와의 싸움에서 '볼드모트와의 싸움은 자신의 운명이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싸워야 한다'는 다소 피동적(被動的)인 자세와, '볼드모트는 부모님의 원수이자, 세상을 위해서 없어져야 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능동적(能動的)자세는, '싸워야 한다'는 같은 결론에 도달할지라도 그 결론에 마주하는 자세가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내용들은 결국 "운명의 선택을 받을것이냐, 운명을 선택할 것이냐"라는 다소 철학적인 고민에 도달하게 하는데, 나는 여기서 "우리가 선택하는 일 하나하나가 모여, '운명'이라는 단어를 성립시키는 것이다."라는 결론을 성급히 내려본다.
호접몽(胡蝶夢)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는 내용이 진행될 수록 철학적인 영역에 손을 대더니,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호접몽을 연상시키는 '킹스 크로스'라는 장(章)까지 등장한다. 여기서 해리는 죽음과 삶, 이승과 저승의 사이에서 덤블도어와 대화를 통해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깨달음을 찾는다. 말 그대로 해리는 죽은것이 산것인지 산것이 죽은 것인지 모르는 경계에서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는 호접몽을 경험한 것이다.
'번역의 질' 문제일 수 있지만, 해리 포터 시리즈의 초반부는 흥미로운 내용과는 별개로 매끄럽지 못한 표현들이 군데군데 눈에 거슬렸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그 표현들도 탄탄해졌으며 흥미로운 소재들을 짜 맞추는 구성도 정교해진다는 느낌이었다. 판타지 소설을 선호하지 않던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를 잃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는 점만으로도 이 시리즈가 왜 그렇게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을 수 있었는지도 공감할 수 있었다. 처음 자녀들의 기저기값을 마련하고자 해리포터를 집필하기 시작했다는 조앤 롤링의 인생역전에 놀라움을 표하고, 이런 책을 집필할수 있는 그의 상상력에 경의(敬意)를 표하며 이번 포스팅을 마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