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치노, 콜린파렐 주연의 이 영화는 개봉한지 벌써 7년이나 지난 "구식(?)" 영화다. 개봉했을 당시에 이미 본바 있지만, 이번에 케이블TV를 통해 다시 보니 이전에는 들지 않았던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 이렇게 글을 남긴다.
이 영화는 사람들이 영화속에나 볼수있는CIA라는 특수집단을 치밀하게 묘사해 현실감을 부여한다. 사실 내가 CIA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아는 바는 전혀 없기 때문에, 이 영화가 얼마나 현실과 가깝게 CIA를 묘사했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단지 여기서 '치밀하게 묘사'했다는 표현을 한 것은 그 조직의 속성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요소들을 기존과는 다르게 '드러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묘사되는 CIA는 한마디로 '정의의 사도'에 가깝다. 하지만 CIA와 같은 첩보기관은 비밀의 유지가 조직 유지의 핵심이기 때문에 그에 따르는 비위(非違)가 비일비재(非一非再)할것이라는 것은 쉽게 예측가능하다. 보다 철저한 비밀 유지를 위해 동료간에도 그 비밀을 유지하고, 때로는 기만(欺瞞)해야 하는 것이 '일'이라면 그 문제는 보다 심각하지 않을까? 그런 측면에서 영화 '리쿠르트'는 아무래도 CIA라는 조직에 대해 기존의 다른 영화들 보다는 보다 현실적인 것이 아닐까하고 추측되는 것이다.
이런 '현실성'은 역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어떤이는 '세상은 결국 혼자 사는거야.'라고 말하고, 어떤이는 반대로 '세상은 같이 살아가는거야.'라고 말한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때 이 영화가 '자기 자신만을 믿으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제임스 클레이튼이라는 인물이 동료이자 연인인 레이나를 믿는 마지막 선택은 '결국 사람을 믿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같기도 하다. ―레이나가 정말 제임스 클레이튼과 연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서로의 관계가 진심과 기만을 뒤섞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사람을 믿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뒷끝이 개운치 않은 것은 여전하다. 사람을 믿는다는 행위 자체도 '이 사람을 믿어도 되겠다'라는 '자기 확신'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타인에 대한 신용(信用)'도 결국 '스스로를 믿는 행위'이지 타인을 믿는것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낼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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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도] S1. His Concern
이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미리 밝혀두지만, 나는 비교적 보수적이고 유교적 문화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섹스(sex)에 대한 얘기를 남앞에서 하는것 자체를 터부(taboo)시 하는 편이다. 하지만 주로 그 '섹스'에 대해, 혹은 그에 연관된 '사랑'에 대해 다루고 있는 영화 '오감도'에 대해 글을 쓰고자 마음먹었기에 나 스스로의 금기(?)를 이번만큼은 깨보기로 했다.
나는 사실 영화 '오감도'를 극장에서 보지는 않았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극장에서 볼 생각은 전혀 없었고, 그 이후에라도 찾아서 볼 생각조차 없었다. 이 영화는 '에로스(eros), 그 이상의 사랑 이야기', '사랑의 편견을 벗어라!'라는 문구로 어느 정도의 선정성을 내세워 홍보를 했고, 그것이 영 내 취향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팀 직원들과 퇴근 후 영화를 보곤 했었는데, 팀 직원중 한명이 '오감도'를 추천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접하게 된 케이블TV를 통해서였다. 다소 부정적이었던 영화에 대한 기대치와는 달리, ―내 감정의 기복 탓일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의 첫번째 세그먼트(segment)는 긍정적인 측면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오감도'는 총 5개의 에피소드(episode, 혹은 세그먼트)로 구성되어있는 옴니버스 영화다. 이 글에서는 첫번째 에피소드인 'His concern'에 대해서만 다루도록 하겠다.―
'His concern'은 조각같은 외모와 쉴세없이 돌아가는 잔머리와는 다르게 여자앞에서는 쑥맥인 한 '남자', 그리고 시크(chic)한 매력을 가진 큐레이터인 '그녀'의 첫 만남과 두 번째 만남, 그리고 하룻밤의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두 남녀의 독백(獨白)이다. 그 중 대표적인 몇가지를 꼽자면 다음과 같다.
"혼자 다니는 사람에게 좌석 티켓이라는 것은, 어쩌면 일종의 즉석복권일지도 모른다."
현실에서도 혼자 다니는 사람에게 옆에 앉게 될 사람은 매우 중요하다. 즐거운 마음으로 여행을 시작했으나, 너무나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사람이 옆에 앉는다고 상상해 보자. 그 얼마나 곤욕스러운 일인가? 10분의 동행이 10시간 같을 것이고, 심지어 숨쉬기 조차도 곤욕스러울 것이다.
반면, 약간은 침울하게 시작한 여행이라 할지라도, 옆에 앉은 사람이 유쾌하고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긴 시간의 이동도 지극히 즐거운 일일 것이다.
이점은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와 같이 일하는 사람, 혹은 배우자, 삶의 곳곳에서 부딪히거나 엮일 사람을 내 의지대로 선택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삶의 질이 천차만별이 되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그 사람들이 나의 "복권(福卷)"이라 할만 하다.
"그녀와 섹스를 해서 좋은 것이 아니라 그녀와 섹스를 하는 사이라서 좋은 것이라면 사랑이라 부를만한다."
앞서 밝혔듯, 이 말은 내가 지극히 터부시 하던 영역에 해당하는 대사다. 하지만 이 대사는 근래 하고 있는 한가지 고민에 괜찮은(?) 답을 해주고 있다.
그 동기는 불분명하지만, 근래 '사랑'이라는 말과 행동, 그 감정의 정체에 대해 원론적으로 생각해보고 있다. 어떤 철학자는 사랑의 근본을 '희생'이라고 했고, 어떤이는 '섹스'라고도 했다. 이것은 정신적인 것이냐, 육체적인 것이냐에 대한 것인데 이들은 모두 내 기준에 명확한 정의는 아니었다. '희생'으로 시작된 '사랑'이라 할지라도, 남녀간의 사랑이라면 육체적으로 끌릴 수도 있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사랑'이 아닌것은 아니다. '섹스'라는 행위 자체 만으로는 번식의 본능을 설명할 수 있겠지만 '사랑'이라 부르기엔 부족함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했을 때, '사랑'에 대해 객관적으로―'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객관적일 수 없는 개념일지 모른다. 여기서는 어디까지나 '비교적' 객관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정의하기 위해서는 '육체적'요소와 '정신적' 요소가 적절히 조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이 대사는 비교적 명쾌하게 기준선을 제시해준다. '섹스'라는 행위 자체에 대한 감정이 '사랑'인지 여부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섹스의 대상'에 따른 감정이 '사랑'인지 여부를 결정짓는 것이라면, 내 고민에 대한 납득할 만한 답이 된다라는 판단이 선 것이다. '섹스'라는 행위 그 자체가 좋은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의 섹스'이기 때문에 좋은 것이라면,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하기에 충분한 것이 아닐까?
'오감도'라는 영화가 평단이나 관객으로부터 그리 좋은 평가를 받은 영화는 아닌것 같다. 사실 나는 영화의 극히 일부분(약 20% 수준)만을 본 것이고, 그 부분에서 역시 '감동'에 가까운 느낌을 받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내가 본 그 일부분의 영화에서는 어느정도 곱씹어 볼 이야기들이 있었고, 다른 사람들도 그 대사 하나하나를 곱씹어볼만 하다 이야기할 수는 있다. 그리고 인류가 영원히 정의하기 어려울 일이겠지만, '사랑'이라는 개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기를 권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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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셉션] 호접몽(胡蝶夢). 그 이상의 상상력
호접지몽(胡蝶之夢). 이것은 장자(莊子)가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는데, 나비가 장자인지 장자가 나비인지 분간하지 못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이말은 또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 또는 인생의 무상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인셉션'이라는 영화를 한마디로 "호접몽이라는 동양의 고사성어를 헐리우드식의 표현으로 시각화 시킨 영화"라고 정의하고 싶다.
크리스토퍼 놀런이라는 이 놀라운 감독은 인셉션에서 '드림머신'이라는 상상속의 이기를 통해 '꿈'이라는 추상적인 존재를 형상화시켰다. 또 꿈과 현실에 대한 시간적 분석, 기억과 꿈의 관계에 대한 독특한 해석으로 꿈속의 놀라운 세상을 시각화하고 극화(劇化)하는데 성공했다.
사실 이 영화는 줄거리 자체의 심오함보다는 '꿈'과 '현실'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한다. 연일 화제가 되고 있는 감독의 독특한 상상력과 시각효과는 그 '생각'을 가속화하는 하나의 디딤돌 역할을 할 뿐이다. '과연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가?', '현실의 기억과 꿈. 그것들이 반영돼 다시 현실이 되는 꿈속'에 대한 다소 철학적인 생각들?
전반적으로 영화의 전개를 따라가는것이 다소 '머리아팠'지만, 그 과정에서 갖게 되는 생각의 깊이도 상당히 깊었고, 그 생각의 내용 역시도 매우 건전했으며, 눈에 보이는 비쥬얼(visual) 역시도 만족스러웠기에 누가 영화에 대해 물어본다면 "만족스러운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꿈의 밑바닥이라고 하는 개념, 꿈속에서의 죽음과 약물의 사용에 대한 관계는 영화가 끝날때까지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어 아쉬움이 남았다. 사실 이 내용에 대한 설명이 영화속에 있었지만, 극의 논리적 타당성을 밝히기 위한 그야말로 "설명"의 성격이 강했다. 또 주인공의 입을 통해 이루어진 '빠른 설명'이었기 때문에 다소 생각이 느린 나로서는 그 내용을 모두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래도 그 설명들에 대해 약간이나마 더 시간을 할애해서 설명했다면 영화의 보다 심오한(?) 의미를 공감하는데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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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아이] 감성이 배제(排除])된 기술에의 회의
누구에게나 '지금까지 봤던 영화중에 기억에 남는 것을 딱 하나만 꼽아보라'면 쉽게 대답하기 어렵겠지만, 그 후보에 들만한 영화들의 경우라면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그 후보중 하나로 꼽을수 있는 것이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Enemy Of The State)'다. 거의 10년전, 수능을 치른 직후에 본 영화지만 아직도 그 영화가 기억에 남는 이유는 문명의 산물(産物)들이 사회 구성원 개개인을 감시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는 다소 섬뜩한 설정때문이다. 공학의 일종(정확히는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자 했던 나에게 기술의 순기능과 역기능에 대해 다소 진지하게 생각하게 했던 첫번째 영화였던것이다.
국가 보안과 관련된 첩보 활동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기(利器) 이상의 것들이 활용되고 있다는 점과 영화로부터 이미 10년의 시간이 경과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에서의 설정은 벌써 현실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 '이글 아이(Eagle Eye)'는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한단계 뛰어넘고 있다. 나는 처음 영화 제목과 간단한 줄거리 소개만을 보고 '멀리 있는 먹이를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도 유명한 독수리의 뛰어난 시력'만을 생각했다. 단순히 '뛰어난 감시 체계'에 대한 영화일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의 '이글 아이', 컴퓨터 '아이다'는 오히려 영화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의 '스카이넷'과 닮아있다. 정보 수집 능력과 상황 판단 능력,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의지와, 그 의지를 실현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지금의 기술 발전 속도로 본다면, '이글 아이'의 '아이다'나 '터미네이터'의 '스카이넷'이 꿈만 같은 얘기는 아니다. 또한 공학을 전공한 엔지니어의 한 사람으로서, 기술의 발전 방향이 '보다 사람에 가까운, 그리고 유사한 모습'을 띄게 하는 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어쩌면 '이글 아이'의 '아이다'나 '터미네이터'의 '스카이넷'이 "순수 기술"이 지향하는 '궁극의 컴퓨터'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생각해야 할 점은 '인간이 어떻게 인간의 피조물(被造物)과 차별화 되냐'는 것이다. 나의 짧은 생각으로는 그것이 "감성(感性)"과 "의지(意志)"에 있지 않나 싶다. 인간은 수치적으로 계산되는 손실을 감수하고라도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랑"과 "희생"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인간은 "꿈"을 꾸고, 그 꿈을 실현하려는 "의지"를 통해 스스로를 발전시켜 나감으로서 다른 존재들과의 차별을 이룬다. 우리가 기술을 이용해 우리의 피조물에 '감성'이나 '의지'를 주입시키면 어떻게 될까. 사실 감성을 제대로 주입시키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영화 'A.I'에서의 데이빗처럼 인간의 동반자가 될수 있는 존재가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 물론 삐뚤어진 감성을 가진 피조물은 예외다 ― 하지만 감성 없이 의지만을 주입시킨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재앙 속으로 몰아 넣을 수 있다. 대부분의 피조물은 인간이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도구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인간보다 강인하다. 온갖 기계는 육체적 한계를, 각종 정보기기는 '망각'과 '속도'라는 두뇌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인 것이다. 이런 피조물에 '감성'없는 '의지'만을 부여한다면, 인간은 오히려 피조물에게 '정복의 대상'이 되기 쉽다. 인간의 '감성'에 의해 빚어지는 각종 비효율이 우리 피조물의 계산적 판단으로 본다면 매우 못마땅한 것이 될것은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비효율을 불러오는 '감성'이야 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장 큰 차별성이기에, 인간 스스로 그것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점을 반복해 부연(敷演)해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 엔지니어는 기술 발전의 상한에 선을 긋고, 스스로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끊임없이 반문(反問)해야 한다. 앞선 포스팅에서도 주장했듯, 감성과 도덕성이 결여된 기술은 인간 스스로에 대한 '흉기(凶器)'일 뿐인 것이다.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긴장감있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또한 초반에 '중강(中强)' 수준의 액션을 보여주고, 늘어질만 하면 한번씩 긴장감을 조여줄만한 액션을 반복해서 보여준다는 '헐리웃 액션 영화의 법칙'도 성실하게 지켜주고 있어, 러닝타임(running time)내내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받은 느낌이다. 또한 '트랜스포머'에서 유약하고 어리게만 보았던 '샤이아 라보프'의 연기도 기대 이상이었고, 내용상으로도 엔지니어인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단 개인적으로 한가지 아쉬운점이 있다면 액션 장면들이 과대(過大)하고 빨라 '정신없다'라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점은 액션 영화를 즐기는 사람입장에서 보면 '가당찮은 투정'에 불과할 수 있다는 점도 알고는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 취향'에 근접한 문제이므로 꿋꿋이 '투정어린 불만'을 늘어놓은 것으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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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나이트] 선악의 경계
게으름은 블로거들의 공통적인 고민이겠지만, 나 역시 어느새 "귀찮음 증후군"에 의해 생각을 글로 옮기는 작업에 소홀해졌다. 블로그에 포스팅하는 글의 수를 월별로 보면 매달 절반씩 떨어지더니, 심지어는 하나도 없는 달이 속출한 것이 그 부정할수 없는 방증(傍證)일것이다. 게으름에 대한 조금의 경각심과, 생각을 어디엔가 쏟아놓고 싶은 욕구가 만나 다시 포스팅을 시작하려했으나, 수십일간 엉켜버린 생각의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풀어낼지 몰라 하던차에, 포스팅을 위해 다운받아 놓았던 "다크나이트(The Dark Knight)" 포스터를 발견했다. 물론 영화를 본지는 이미 한달하고도 십여일은 거뜬히 지났겠지만, 그 잔영이 너무나 뚜렷해 약간의 부지런함을 발휘해보고자한다.
중·고등학교 윤리시간에 배운 철학 사상들은 너무나 많지만,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기억해낼 만한 것들이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로 대표되는 인간 본성에 대한 논의이다. 서로 배치(背馳)되는 이 두 철학은 그들 사이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것인가를 결론 짓는것이 어리석다라는 생각이 들 만큼 물고 물리는 관계에 있다. 이 안에서 내가 내렸던 어정쩡한 결론은 "인간은 모두 자신의 '욕망'에 따라 움직인다"라는 것이다. 약간은 괴변일수도 있는 이 말은 표면적으로 볼때 성악설에 가까워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단순화해서 양단을 두동강내기에는 생각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먼저 욕망이라는 말 자체도 그 의미가 조금은 모호하다. 사전적으로 봤을때 욕망은 두가지 한자로 씌여진다.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는 마음인 욕망(欲望)'과 '무엇인가를 탐하고자 하는 마음인 욕망(慾望)' 다시한번 괴변을 늘어놓자면 그 두가지 욕망은 결국 같은 것이다.
선(善)을 행하는 사람이라 칭해질 수 있는 자원봉사자를 예로 들어보자. 그를 걷으로 보기에는 자신의 욕심은 없이 남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조금만 더 깊게 보면 그는 '남을 돕는 행위'에서 만족을 느끼고, 그는 본능적으로 그 만족을 취하고자 하는 "욕망"에 '자원봉사'라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사람까지도, 남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버리는 것에 보다 많은 만족을 느낄수 있기에 그런 행동을 할수 있는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 사실이다. 반면 악(惡)을 행하는 사람은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이, 개인적 탐욕을 채우고자 하는 "욕망"에 의해 행위를 한다. 어쩌면 성선이던 성악이던 하는 문제는 근본적으로 '사람이 기본적으로 욕망을 따라 움직인다'라는 기본을 깔고, 어떤 욕망을 취하느냐하는 것이 본성이냐를 따지는 것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하지만 누구나 기본적으로 자신을 만족시킬 수 있는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욕망이 있고, 또 그 욕망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 아닐까 한다.
"다크나이트"에서는 그 선악의 경계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다크나이트라는 영화가 워낙 큰 인기를 얻다보니, 그 즈음에 포스팅되었던 많은 글에서 원작 "배트맨"을 분석하거나 리뷰했다. 그중에 먼저 상기했으면 하는 내용이 왜 배트맨이 배트맨이 되었고, 조커가 왜 조커가 되었느냐하는 것이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배트맨은 폭력앞에서 죽어간 부모의 원한을 갚기위해 '정의'라는 편에 섰고, 조커는 사랑하는 아내의 어이없는 죽음이 계기가 돼 인격 장애가 생겼고, 그것이 그를 '악'이라는 편에 서게 했다. 결론적으로 배트맨과 조커는 각각 "절대선"과 "절대악"을 대표하지만, 그들의 변화과정을 전체적으로 지켜봤을 때, 과연 그들을 "절대선"이라 무조건 영웅시하고, "절대악"이라 무조건 비난할 수 있겠는가? 사실 이들의 경계를 "다크나이트"라는 영화안에서 연결시켜주는 인물이 '하비 던트'이다. 정의의 수호자가 개인적 좌절에 의해 어떻게 악인의 하나인 '투페이스'로 변해 가는지. 물론 그 변화에 대한 진로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기는 했지만, 적어도 나의 기준으로는 그를 "악한(惡漢)"으로 무조건 비난만 할 수 없는, 불쌍한 인물이었다.
어쩌면 인간 두뇌의 태생적 한계에서 비롯된 것일수도 있지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명확한 것을 좋아한다. 흔히들 "흑백논리"라 부르고 비판하는 판단들이 우리 삶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선-악', '적(適)-아(我)', '참-거짓' 심지어 우리가 첨단이라 부르는 '디지털'이라는 단어 자체도 연속적인 것을 연속적이지 않은것으로 재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악인이 개과천선하여 절대 선인이 될수도 있고,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또 적이었던 사람이 친구가 될수도 있고, 그가 다시 적이 될 수도 있다. 이는 모두 사람 개개인이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기본 성향은 같지만, 어떤 욕망을 택하는지에 대한 성향이 능동적으로 바뀔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영화 다크나이트는 배트맨과 조커, 투페이스를 통해 선악의 경계와 그 모호함. 그리고 가변성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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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즐기기 좋은 김치 웨스턴
이 영화는 제목 그대로 좋은 놈 박도원(정우성)과 나쁜 놈 박창이(이병헌), 그리고 이상한 놈 윤태구(송강호). 세명의 인물을 정면에 세운 한국형 서부 영화이다. 일부 언론에서 말하듯 일명 "김치 웨스턴 무비" 익히 보아온 원조 서부영화의 소재들이 이 영화의 밑바탕이 된다. 보물지도와 열차강도. 그리고 최고의 총잡이가 되고자 하는 집념까지. 서부영화의 원조라 할수 있는 헐리웃 영화의 배경이 미국 서부 개척시대인 반면, 이 영화의 배경은 일제강점기의 만주대륙이라는 점이 다른 점이다.
이 영화에서는 잠잠해질만 하면 터지는 "박진감 넘치는 총격전"이 묘미이고, 그런 볼거리를 쫓다보면 2시간 여의 러닝타임이 훌쩍 지나가버린다. "재미는 있으돼 남는 것은 없는 영화"라고나 할까? 아마도 극과 극으로 엇갈리는 영화 관람평도 그로 인한것이 아닌가 한다. 보여주는 볼거리에 주목한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영화일 것이고, 영화의 "내포적 의미"에 무게를 두고 영화를 보는 사람에게는 최악의 영화일테니 말이다.
지금와서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 영화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닌듯하다. 단지 볼거리를 제공하는데 집중하다보니, 그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너무 짧고 단순하게 내 밷어버려 보는이들의 머릿속에 그 잔상이 남지 않았을 뿐이다. 박도원은 윤태구와의 대화에서 이런 말을 한다. "사람은 누구나 큰 꿈을 쫓을 권리가 있어, 하지만 무언가를 갖기위해 무엇인가를 쫓다보면 무엇인가에게 쫓기게 되지. 결국 쫓고 쫓기는 순환의 굴레를 평생 벗어날 수 없는게 인생이야." 이 이야기를 되짚어 생각해보면, 이 영화의 전체 줄거리와 맞닿아 있다. 보물지도를 쫓다보니 누군가에게 또 다시 쫓기게 되고, 최고의 총잡이가 되고자 하다보니 또 다른 누군가의 원한을 사 또다시 쫓기게 되는 등장 인물들의 이야기는 그 한마디 대사에 압축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이렇게 의미를 "짜 내고자 하는 노력"자체가 어쩌면 매우 어리석은 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를 비롯한 모든 문화는 향유하는 사람들이 즐겁고, 그 즐거움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의식이 전달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일단 즐겁게 즐기기에 충분한 영화이다. 이병헌의 차가운 눈빛과 총 다루는 기술은 소름끼치도록 아름답고, 정우성은 그보다 더 멋있을 수 없으며, 송강호는 그렇게 능청스러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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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콕] 사랑하기에 슬픈 영웅
슈퍼맨 못지 않은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까칠한 성격과 홈리스(homeless)와 같은 행색을 하고 있는 슈퍼 히어로(super-hero) "핸콕". 이것이 대부분의 방송광고에서 나오는 영화 "핸콕"에 대한 소개말이다. 사실 번듯한 외모에 명석한 두뇌, 그리고 누구에게도 뒤쳐지지 않는 능력으로 하나같이 윤색(潤色)되었던 여느 슈퍼 히어로와는 다른, "핸콕"의 모습은 "슈퍼 히어로 액션물"에 재미를 느껴왔던 나에게 호기심의 대상일 수 밖에 없었다.
영화의 전반부에서는 예고에서와 같이 주인공 핸콕의 능력과 행실에 대한 묘사로 이루어져있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부는 핸콕의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이야기에 할애되어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의 이야기가 사뭇 다른 점을 보고 후반부의 이야기는 '속편'으로 만드는 것이 어땠을까 하는 의견도 낼 정도로 각각이 재미있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이야기는 즉 90여분이라는 러닝타임의 한계로 인해, 풍부하게 만들어 갈 수 있었던 내용을 너무 짧게 정리해버린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화 "핸콕"을 보고나서 느끼는 점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나는 슬프다는 감정이 가장 앞섰다. 슈퍼 히어로라는 이유만으로 늘어날 수 밖에 없는 적(敵)과, 사랑앞에 약해질 수 밖에 없는 운명. 그러나 자석처럼 끌리는 인연(因緣)으로 그들의 고난은 반복될 수 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적당한 수준의 해피엔딩을 찾아가지만, 아무래도 그들의 운명을 마냥 행복하게만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나에게는 "슬픔"이 먼저였던 것이다. 영화 "핸콕"이 "재미있는 영화"라는 사실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마냥 즐겁기만 한 영화이지는 않았기에, 이 시점에서의 감성적 판단은 보류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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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티드] 공상속의 액션물
총알을 휘어서 쏘거나, 고속으로 달리는 중에 사람을 차에 태우는 장면. 지난 몇주간 이런 저럼 매체에서 볼 수 있었던 "원티드"의 티져 영상이었다. '툼레이더' 시리즈와 '미스터&미세스 스미스' 이후 나에게 여전사로 각인된 안젤리나 졸리와 유순하게만 보이는 제임스 맥어보이, 이전 작품들에서 인상 깊은 연기를 보여준 모건 프리먼 등이 최고의 킬러로 등장하는 이 영화의 티저영상은 나에게 관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즐기기에 충분히 좋은 영화"라는 것이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적인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화려한 액션들 만으로도 100여분의 러닝 타임이 아깝지 않았다. 물론 이 영화라고 전혀 생각할 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생각의 거리'라는 것이, 전체를 관통할 만한 것이 아니고, 단편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마쵸(macho) 영화 초반,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He's the man!"이다. 유약하게까지 보이는 제임스 맥어보이는 영화 초반 상사에게 시달리고, 동료에게 이용당하며, 심지어는 애인을 동료에게 빼앗긴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남성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말해주고 있다. '거칠게 자신을 피력하는 것이 남성적이다'라는 것. 하지만 이 영화는 말하고 싶었던것인지 모른다. '거친것이 남성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남성적인 것이다'
자신을 가두지 말라 제임스 맥어보이가 영화 초반 무기력해 보였던 것은 성격의 탓도 있겠지만, 자신이 잠재력을 공포 장애로 생각해 약물로 억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 스스로의 가능성을 가두지 않고 열어 놓는 순간 진정한 자신의 잠재력을 깨닫게 된다. 사실 우리 스스로도 어떤 어려운 일에 닥쳤을 때, "이 일을 내가 어떻게 해."라는 생각보다는 "할수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할때 자신의 능력이 극대화되곤 한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 이 영화의 최대 반전은 "적아(敵我)의 반전"이라 할 수있다. 눈 앞에서 진실이라고 보였던 것들이 조금더 알고 보니 거짓이었다는 것. 그리고 거짓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 진실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현실로, 눈에 보이는 광고나 언론의 주장에 자신의 관점을 투영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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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 스마트] 마냥 즐겁게 즐길수 있는 미국식 첩보 코미디
코미디 영화처럼 국적을 뛰어넘기 어려운 장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웃음"이라는 것은 그 시대의 사회상이나 문화적 특수성에 상당부분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이슬람의 '알라'를 모티브로 유희로 삼을 수 있지만, 같은 것을 접한 이슬람 문화권 사람에게는 신성모독이며, 용서 받지 못할 범죄일수 있다는 점이 그 예가 될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외국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코믹물이 국내에서는 그만한 성과를 이루지 못한 것이 아닐까?
"겟 스마트"는 '007 시리즈'를 노골적으로 패러디하며 1970년까지 미국에서 방영된 동명의 코믹 첩보 드라마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한다. 또 "겟 스마트"의 감독을 맡은 피터 시걸 역시 '총알 탄 사나이 3', '너티 프로페서 2', '첫 키스만 50번째' 등에서 그만의 코미디 세계를 가감없이 보여줬다. 이에따라 "겟 스마트"는 상당 수준의 흥행을 기대하게 했고, 실제로 미국에서는 그 기대에 부응한다 할 만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앞서 밝힌바와 같이 '문화의 벽'을 제대로 넘지 못해서일까? 우리나라에서는 그만큼의 흥행을 기록하고 있지는 못하고 있다.
이전 포스팅에서도 한번 언급한 바와 같이 유행은 돌고 돈다. 우리나라 코미디는 심형래로 대표되던 '슬랩스틱'이 식상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어느새 개그콘서트로 대표되는 '스탠딩 개그'가 주류를 이루게 됐다. 또한 어느새 그 '스탠딩 개그'의 한계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슬랩스틱'으로의 회기를 모색하고 있다. 사실 스탠딩 개그라는 것이 주로 '말'로 이루어지는 언어유희에 가깝기 때문에 문화적·시대적 특성을 강하게 탈수밖에 없다. ― 사실 이는 정확한 사전적 정의에 의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스탠딩 개그가 언어유희에 가깝다고 언급한 것은 국내에 소개된 대부분의 스탠딩 개그를 보고 난 후의 개인적인 느낌에 가깝다. ― 하지만 아무래도 슬랩스틱은 문화나 시대의 특성의 영향을 덜 받기 마련이다.
"겟 스마트"는 피터 시걸의 다른 코믹물과 같이 '슬랩스틱'의 공식들을 성실히 따르고 있을 뿐 아니라 나름대로 탄탄한 내용의 첩보물을 골격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그 재미는 배가되고 있다. 사실 이미 국내에는 '총알 탄 사나이' 시리즈가 비슷한 유형의 코믹물로서 소개된 바 있다. 하지만 '총알 탄 사나이가' 시나리오보다는 '슬랩스틱'에 훨씬 큰 비중을 둔 바람에 극에 집중할 수가 없었던 반면, "겟 스마트"의 '슬랩스틱'은 줄거리에 대한 집중을 해칠 정도는 아니며, 요소요소 적절히 배치된 '슬랩스틱'은 오히려 줄거리에 대한 재미를 더한다고 하겠다. "겟 스마트"가 국내 개봉을 통해서 기록적인 흥행을 기록할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미국식의 코미디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부담없이 웃고 즐기기에는 손색이 없는 영화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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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크레더블 헐크] 자아 정체성 위기(?)에서 벗어난 액션 히어로
최근 상영된 만화 원작의 슈퍼 히어로 영화들의 주된 관심사는 그들의 "자아 정체성"에 있었다. 갑작스레 생긴 능력에 대한 그들의 반응, 혹은 태생적 고민, 그리고 스스로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고민까지. 대부분의 원작이 슈퍼 히어로의 액션 활극에 촛점을 맞춘데 비해 최근의 영화들이 다소 철학적인 주제로 빠지는 것은 일종의 유행에 대한 편승이 아닌가 한다. 어느 순간 우리는 영화를 단순히 영화로 보는 것이 아니고, 교화의 매체나 특정 메시지 전달을 위한 메신저로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돌이켜보면 5,6년 전을 즈음하여 영화를 중심으로 한 매체들에 대해 "철학"과 "결말의 반전", "통념의 전복(轉覆)"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같다. 물론 그때는 그것이 단순 오락물로서의 역할이 강했던 매체들에 참신함을 덧 씌우기 위한 시도였다. 하지만 유행은 돌고 돈다 했던가? 단순 오락 거리로서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중요시 됐던 그런 "철학과 반전의 중시, 통념의 전복" 풍조는 어느새 "진부한 표현 방법"이 되어버렸기에, 이제는 다시금 순수한 오락물로의 회귀를 준비하고 있다.
이번에 개봉된 "인크레더블 헐크"는 그 연장선상에 있다. 물론 이 영화에도 "헐크"와 "브루스 배너" 사이의 정체성에 대해 언급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브루스 배너가 평범한 사람이 되기 위한 발버둥이지, 근본적인 "자아 정체성"고민이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설령 그것을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라고 받아들일지라도 극의 전반을 관통하는 정서의 흐름은 아닌것이다. 이 영화는 전통적인 오락물의 공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선악 대립의 단순 명쾌한 줄거리, 풍부한 볼거리, 권선징악의 요소까지. 더불어 "Mr. Blue"가 헐크의 혈청에 반응하는 부분을 보여줌으로서 속편에 대한 복선까지도 보여준다. 이 "Mr. Blue"는 헐크의 혈청에 관심을 가지고 헐크를 도와주던 인물이지만, 그 도움이 자신의 "연구에 대한 욕구"를 위한 것인지 헐크를 "돕기"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선악의 중간 선상에 있는 사람이기에 그의 변화가 더욱 기대된다.
최근들어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즐겁게"만 볼 수 있는 영화에 보다 후한 평을 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이 영화 역시도 "오락영화로서 매우 완성도 있다"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선악과 흑백을 구분해 그 경계를 뚜렷하게 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고(是非之心), 대부분의 남자들은 파괴적인 본능 ― 여기서의 파괴적인 본능이란 호승심과 호전적 기질 등을 가리키는 것이지 결코 무언가를 파괴해야 한다는 본능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 을 내재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 영화는 어느정도의 대리 만족을 느끼게 해 줄것으로 기대된다. 이 영화는 액션 영화에 거부감 없는 여성에게, 그리고 사회적 책임으로 자신의 "액션 본능(?)"을 자제하고 있는 남성들에게 좋은 "오락 거리"로 추천하고 싶다.